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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든스,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책 표지
기든스,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책 표지 ⓒ 인간사랑
영국으로 유학을 오기 전만 하더라도 나에게 제 3의 길이니, 신노동당(New Labour)이니 하는 것들은 그냥 진보를 참칭하는 사이비쯤일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신노동당이 집권한 영국의 현실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영국 정치와 정책에 대한 나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물론 미리부터 밝혀두지만 그렇다고 내가 제3의 길과 신노동당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처음에 마냥 신기했던 그들의 정치와 정책방향도 수년간 관찰과 연구를 하면서, 그 한계 역시 목도하게 되어 이젠 그걸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제3의 길을 주창하여 신노동당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안서니 기든스의 신서,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 영국 노동당이 다시 이기는 길>(김연각 역, 인간사랑, 2007)은 당연 남다른 의미로 다가 온 것은 물론이다.

 

최근 일어나는 영국 정치에 대한 재조명, 그러나 반복되는 오해들

 

이런 의미는 나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은 않다. 최근에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부쩍 영국식 제3의 길에 대한 관심이 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제대로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조금 의문스럽다.

 

우선 신노동당은 그냥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90년대 영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맞서 새로운 비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 낸 매우 정교하게 짜인 정치사상일 뿐만 아니라 그 일관된 논리와 원리는 지난 10여 년간 신노동당 정부 정책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있으며 이는 실제로 공공 서비스와 사람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왔다.

 

또한 제3의 길이 글자 그대로 사회민주주의도 '아니고' 대처가 표방한 신자유주의도 아닌 '제 3의' 무엇인 것도 아니다. 신노동당은 전후 복지국가를 이룩한 노동당 정부의 사회민주주의 정신을 부정하지 않고, 부정한 적도 없다. 오히려 핵심은 그 정신을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맞춰 어떻게 실현시킬 것이냐는 것이다.

 

영국식 제3의 길을 마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쯤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표방하는 이른바 '개혁세력'이나, 옛 노동당이 추구했던 사회 정의에 대한 배신쯤으로 취급하는 '진보'쪽의 해묵은 비판 역시 이 점을 흔히 소홀히 하고 있다.

 

한국과 다른 현실, 일부 오역 등 한계도 있어

 

기든스의 이 책은 바로 이 맥락에서 위치하고 있다. 즉, 10년간의 신노동당의 성과와 한계를 들여다보면서 10년 전과는 또 다른 변화된 상황과 새로운 쟁점들에 대하여 새로운 혁신의 방향과 구체적 정책 대안들을 새로운 총리가 되는 (그래서 현재 영국 총리인) 또 다른 신노동당의 대표주자인 고든 브라운에게 보내는 고언 형식의 책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면이 이 책의 약점이기도 하다. 이 책의 초점은 철저하게 영국적 상황, 그리고 책이 출판된 그 시점에 매우 충실하게 맞추어져 있어 영국 정치 상황과 정책적 쟁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만 이해할 경우 오독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다가 이런 이 책의 약점은 번역을 통해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몇몇 구절과 개념들에 대한 오역은 영국 정책에 대한 역자의 이해부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의료 재정 뿐 아니라 공급과 보건 정책 전반을 포괄하는 영국의 무상의료서비스 체계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우리나라식 '건강보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는 읽는 내내 정확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역자가 정치학 전공자라는 점에서 양해는 조금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우리나라와 영국 간 '정치' 개념 차이를 보여주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 책 자체는 새로운 총리에게 어떻게 성공적 정치를 해서 노동당이 또 집권할 수 있게 만들 것인가를 조언한 매우 '정치적'인 책이지만 내용은 정책적 논의로 빼곡히 차 있다.

 

이는 기든스가 일부러 정책 정치를 유도하기 위해 그렇게 내용을 채운 게 아니라 이미 영국 정치에서는 정책에서 정치적 승부가 나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공공성'에 대한 재정의, '적극적 복지' 등 주목할 만

 

의회민주주의의 산실인 영국 정치가 보여주는 이러한 역동성은 우리 정치에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이 책이 주는 최대의 미덕은 그 역동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적 고민과 제안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의 고민은 물론 비단 영국적 현실에 국한하지 않은, 진보의 혁신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기도 하다. 이 점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든스가 제안하는 '공공'(public)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적극적 복지(Positive Welfare)의 개념 등이 아닌가 싶다.

 

대처 정부가 공공서비스를 대대적으로 민영화 시키거나 시장적 경쟁 요소를 도입한 것은 복지제도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지만 일정 부분은 그동안 무시되었던 이용자의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국가 독점 복지 모델의 문제점을 짚은 것이기도 했다.

 

기든스는 이 점에서 공공영역을 확대하되 공공은 곧 국가(state)라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무엇이 진정 '공공성'인가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하고 있다. 이에 맞물린 보증국가라는 개념에서 국가는 공공 서비스 공급에 있어 더 이상 독점적 주체는 아니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방임을 넘어 진정 효과적이고 질 높은 공공서비스를 '보증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적극적 복지 역시 사후적 개입에서 벗어나 일상적으로 개인의 자율성과 자존감을 증진시키는 복지가 되어야함을 제시하고 있다. 얼핏 보면 개인 책임과 선택권을 강조하는 복지 축소논리와 닮은 듯하다. 하지만 이 개념은 개인의 책임 뿐 아니라 그 책임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적합한 지원에 대한 국가의 책임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남의 결과물을 그대로 가져오려 하기 보단 그 원리에 주목해야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딛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희망과 대안을 찾아 제시하기 위한 개혁 진영과 진보진영의 고민속에 점점 서구 복지국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나도 영국 유학생활을 어떻게 하게 되면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은 다른 사회를 깊숙이 체험하고 공부하면서 발견하게 된 '다른 사회에 대한 가능성'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다른 사회'가 영국인 것도 아니고 그 '다른 사회'를 위한 길이 '제3의 길'도, '신노동당'도 아니다. 

 

나는 우리사회의 대안을 찾는데 있어 다른 나라에 주목할 때, 그 나라에서 제기되는, 그래서 그 나라에서 성공적이었다는 그 '무엇(what)'이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것이 특정 정책이든 어떤 정치사상이든 간에 말이다. 오히려 그 '무엇'을 이해하면서 궁극적으로 정작 얻어야 할 것은 ‘어떻게(how)'가 아닐까?  다시 말해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떨어진 결과물만 달랑 물고 들어와 그 나라 성공사례를 권위삼아 써먹어 보려는 시도가 우리나라에 진정한 답을 줄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 나라의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 어떻게, 어떤 원리로, 어떤 과정으로, 어떤 기반을 통해 그 대안이 도출된 것이며 또 그 결과물이 어떻게 적용되고, 어떻게 실천되어 성공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어떤 점들이 어떻게 문제가 되어 한계로 들어났는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을 가진 우리나라에서의 제대로 된 함의를 찾는다는 것은 명백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점이 이 책과 같이 다른 나라의 고민을 들여다 볼 때 항상 명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서평은 참여사회연구소 반년간지 시민과 세계에 기고한 글을 축약한 것입니다. 전문은 4월 20일에 발행예정인 시민과 세계 13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제3의길#신노동당#기든스#사민주의#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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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지역및복지행정학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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