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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문화관의 위용
청계천 문화관의 위용 ⓒ 이희동

산수유가 서울까지 올라온 3월 중순의 일요일, 등산화를 새로 산 친구와 함께 용마산에 올랐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리 험하지도 순하지도 않은 용마산이 산을 처음 배우는 친구에게 적당하다 싶었기에 나선 산행이었다.

 

친구는 등산이 처음인 것을 광고라도 하듯 긴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조금이라도 걸을라치면 더워지고 조금이라도 쉴라 치면 추워지는 3월의 날씨에 그의 점퍼는 매우 거추장스러워보였지만, 원래 등산은 그렇게 배우는 거라고 친구를 다독이며 용마산 정상에 섰다.

 

기대와 달리 용마산에서 바라본 서울 하늘은 뿌옇기만 했다. 날씨가 좋으면 청계산에서부터 삼각산까지 쭉 둘러 보련만 뿌연 황사는 저 앞의 남산마저 겨우 볼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유쾌하지 못한 황사의 그 매캐한 냄새.

 

바로 밑의 서울도 보지 못할 거, 점심을 먹고 미련 없이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차산성도 있고, 고구려의 보루 등 유적지도 있었지만 뿌연 황사는 그 모든 것을 후일로 미루어 놓았다. 시간이 되면 구리시의 유별난 고구려 사랑에 대해서도 한 번 짚어보고 싶었건만 이 역시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판자촌 맞은편 문화관... 추억과 자부심

 

고구려 마케팅의 현장
고구려 마케팅의 현장 ⓒ 이희동

산을 내려와 광나루에서 전철을 탔다. 어딜 가기도 뭐하고, 그냥 집에 가기도 어설픈 시간이었지만 나의 발걸음은 주저함이 없었다.

 

서울의 동쪽 쯤 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은 바로 청계천 문화관.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임 시절, 그의 가장 큰 치적으로 내세워지는 청계천 복원사업이 어떻게 기념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어쩌면 청계천 문화관에서 우리의 5년을 내다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장역에서 내려 청계천변을 걷기 시작한다. 청계천이라 하면 광화문과 종로 주변만을 배회했던 내게 그 지역의 청계천은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상류의 청계천이 매우 인공적인데 반해, 그 곳 청계천은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과거 복개와 복원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하천의 모습이리라.

 

청계천에서 그 새끼들과 함께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는 청둥오리들. 청계천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간에 도심 한가운데서 마주친 청둥오리는 분명 반가운 존재였다. 결국 그들과의 공존이 우리네의 인간다운 삶의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변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고, 따뜻한 봄볕을 즐기고 있었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청계천 판자촌의 재현 애환은 사라진 채 추억만이 남아
청계천 판자촌의 재현애환은 사라진 채 추억만이 남아 ⓒ 이희동
청계천과 청계천 문화관.
청계천과 청계천 문화관. ⓒ 이희동

 

청계천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저 앞 천변에 이상한 형태로 늘어선 낯선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판자로 지은 듯한, 베트남 등의 사진을 통해 보았던 수상가옥 비스무리한 그런 건물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청계천 복개 공사 전 천변에 늘어서 있던 판자촌을 재현해 놓은 것으로서 현재는 추억을 전시해 놓고 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떡하니 자리한 청계천 문화관. 으리으리하고 번쩍대는 그 모양새가 건너편 재현건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대와 이젠 먹고 사는 것을 떠나 건축물의 예술성까지 고려하는 현재의 극단적인 비교였으며, 그 시대 차의 시각화였다.

 

시각화라는 것이 사람들을 현혹하는데 있어 가장 훌륭한 기제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건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 과정과 내부사정이 어떻든 간에 좁은 도로 양 옆에 서 있는 상반된 두 건물은 가파른 경제성장을 했던 우리나라의 상징이었으며 자부심이었다. 결국 문화관은 사람들에게 그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었다.

 

청계천 문화관, 들어가자마자 이명박의 얼굴이

 

청계천에서의 이명박 대통령 5년 후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청계천에서의 이명박 대통령5년 후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 이희동

문화관은 위에서부터 밑으로 구경하면서 내려오도록 구조화되어 있었다.

 

밑에서부터 훑고 올라가다가 지쳐 끝내 남은 관람을 포기하고 마는 여타 박물관과는 달리, 청계천 문화관은 친절하게도 관람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해 놓았으며 문화관 곳곳을 샅샅이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었다.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그 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키려면 당연히 이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야 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4층 입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서울 중심부의 모형과 복원된 청계천에 두 발을 담고 손을 흔들고 있는 전 이명박 서울시장의 사진이었다.

 

저 사진 한 장을 걸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역사가 이루어졌던가. 어쩌면 현재 이명박 대통령은 5년 뒤 완공된 대운하에 발을 담그고 손을 흔들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이를 위해서는 청계천과 비교도 안될 만큼의 역사가 필요할 것이고.

 

이야기의 시작을 현재 청계천의 위용으로 시작한 문화관은 다음으로 청계천 복원의 필요성을 강변하기 위해 과거 복개 상태에 있던 청계천을 다루고 있었다.

 

비록 60~70년대 산업화와 함께 복개된 청계천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구조물들이 부식되고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청계천 복원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논리였다. 게다가 청계천을 복원하게 되면 서울 강남과 강북의 지역차도 줄일 수 있으며 경기부양의 효과도 있다지 않은가.

 

이와 같은 설명과 함께 문화관은 복원되기 전 청계천의 지하를 재현해 전시해 놓고 있었다. 복개된 청계천의 어두컴컴한 이미지와 그 곳에서 신음하는 문화유적의 형상화가 주된 목적인 그 공간은 곧 "봐라, 이래도 청계천 복원을 하지 않았겠느냐!"라는 일갈이었다.

 

또한 재현된 공간 틈새에는 식물 모형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청계천 어둠 속 그 지하 한줄기 가느다란 햇빛 속에 힘겹게 자라난 떡잎 하나, 희망이라고 불러봅니다"라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청계천 복원을 위한 눈물겨운 읍소였다.

 

그러나 나의 시선에는 그 모든 것들이 유치찬란함의 극치였다. 언제부터 생명을 위했다고 저리도 낯간지러운 구절을 갖다붙이는지. 내가 저 눈물겨운 구절에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음은 결국 청계천을 복원코자 했던 주체가 대운하를 추진하는 주체와 같은 세력이기 때문이다.

 

희망의 떡잎 필자가 보기에는 한없이 유치해 보였다.
희망의 떡잎필자가 보기에는 한없이 유치해 보였다. ⓒ 이희동

그들의 희망이 유치찬란했던 까닭

 

소위 '토건족'이라 불리는 그들은 청계천의 복원을 주장하며 환경에 관련된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붙였지만 이는 공사를 강행키 위한 수단일 뿐, 그들에게 환경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환경은 오직 개발의 대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는 그들이 현재 추진 중인 대운하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대운하의 정당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오직 경제성만 이야기 할 뿐, 대운하가 가지고 있는 생태파괴적인 요소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환경단체가 그 위험성을 아무리 떠들어보지만, 그들의 눈에 환경단체란 개발의 단 열매를 챙기지 못하는 못난이들의 연합체일 뿐이다. 모든 것의 기준이 경제인 그들에게 환경단체의 이타적 행위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청계천 복원공사는 복개공사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 비록 환경을 내세우며 산업화의 상징인 고가도로를 허문다고 하지만 본질적으로 복원공사는 복개공사와 이란성 쌍둥이일 뿐, 두 공사 모두 환경과는 상관없이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며 그 속에는 개발이데올로기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개발하고 보자는, 개발만 시작하면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천박한 의식.

 

아직도 진행중인 개발의 그림자
아직도 진행중인 개발의 그림자 ⓒ 이희동

 

청계천 문화관은 결국 그 개발이데올로기의 첨병이었다. 환경과 문화·역사 등의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개발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전시물들을 보면서 또 다른 개발을 꿈꾸고 있었다. 친환경적 개발, 얼마나 허울좋은 이야기인가. 아마도 대운하가 완공되면 대운하 기념관이 똑같은 방식으로 이데올로거의 역할을 하리라.

 

문화관은 청계천 복원의 정당성을 한참 설명한 후 청계천의 역사를 전시해 놓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청계천부터 시작해서 일제강점기-해방정국 시기-산업화 시기 그리고 현재까지의 청계천이 모형과 지도들을 통해 요모조모 기록되어 있다. 치수가 곧 근본이라더니 청계천과 관련된 수많은 고민들이 그 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복원공사 전의 청계천을 보고 있자니 예전 청계천에 얽힌 개인적인 기억들이 떠올랐다. 택시를 타고 청계천 고가를 탈 때 끝부분 내리막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짜릿한 기분을 기대하던 기억, 학창시절 불온한 생각으로 청계천 고가 밑을 수도 없이 돌아다닌 기억 등등. 아련한 기억이었지만 흐뭇했다. 아마도 이것이 기록의 힘일 것이다.

 

이만 청계천 문화관을 나왔다. 그밖에 청계천에서 살고 있는 동물·식물 등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갓 복원된 청계천에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조금 더 지켜봐야지 그 진가가 들어날 터, 각종 부작용이 거론되는 청계천을 두고 벌써부터 샴페인을 터뜨리기는 이른 것이 아닐까?

 

청계천 문화관에서 나와 광장시장으로

 

추억을 찾아서 아날로그 장난감이 그리 신기한지
추억을 찾아서아날로그 장난감이 그리 신기한지 ⓒ 이희동

청계천 문화관을 나와 그 앞의 판자촌 재현공간에 갔다. 인천 달동네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불량식품부터 시작해서 온갖 추억의 물품들이 널려 있었고, 많은 이들이 그 앞에서 북적였다. 어른들은 그 앞에서 신경도 쓰지 않는 아이들을 붙잡고 자신의 옛 추억들을 이야기 하느라 바빴고, 평소 PC오락만 하던 아이들은 낯선 아날로그시대 장난감에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북적이는 인파를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팠다. 과연 이 사람들은 그 판자촌에 얽혀있는 애환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아직도 고생하고 있는 이들이 분명 있을진대, 그냥 그렇게 흘러가버린 역사로 기록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어느새 진부해져버린 청계천 판자촌, 청계천 여공들의 이야기를 역사로만 기억하는 이 답답한 현실.

 

내친 김에 청계천변을 걷기 시작했다.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는 꽤 걸어 다녔는데 문화관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는 처음이었다. 해는 저물고 있었으나 여전히 많은 연인들이 천변을 거닐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나른한 일요일 천변의 오후 따뜻한 봄볕을 쬐고 계신 할머니들
나른한 일요일 천변의 오후따뜻한 봄볕을 쬐고 계신 할머니들 ⓒ 정가람

오늘의 청계천 기행의 마지막 종착역은 종로5가 광장시장이었다. 산도 내려왔겠다, 청계천도 걸었겠다, 막걸리 한 사발이 그리워졌던 탓이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광장시장. 역시나 그 명성만큼이나 정겨운 풍경들이 펼쳐졌다. 먹음직한 순대와 빈대떡·해물 등등 수많은 먹을거리들이 지나가던 과객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언론에서 그 위생 상태를 지적해도 끝까지 살아남는 길거리 음식들. 결국 그것들이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민중의 힘일 것이다. 아주 큰 하자가 없는 이상 힘겹게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위생보다는 가격이 중요할 터, 이 곳은 아마도 과거 청계천의 그 많은 상인들을 먹여 살렸을 것이다.

 

광장시장의 오래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젊은이들이 꽤 있었는데, UCC 등의 맛집 코드를 타고 찾아온 이들도 적지 않은 것 같았다. 과연 그들이 광장시장과 청계천에 얽힌  애환들을 이해할까 거창한 생각도 해보지만, 어쨌든 그렇게라도 신구가 조합되어 시장이 이어져나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발걸음은 소중한 것이리라. 시장은 시장일 뿐, 과도한 이념 공세는 서민 운운하며 시장을 찾아오는 정치인의 몫일 터.

 

이만 광장시장을 나와 집으로 향한다. 어둠이 내리는 청계천을 보며 이 광경이 5년 후에 어떻게 재현될까 하는 고민과 함께.

 

광장시장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그곳
광장시장서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그곳 ⓒ 정가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청계천문화관#광장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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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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