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아름답습니다." "… 아름답지요?"이곳은 작지만 아름다운 서점이라며 감동하고, 낡은 책을 보여주면서 지금 봐도 아름답지 않느냐며 동의를 구한다. 아름다움의 실사구시. 아름다움의 동어반복. 묘하게도 그것은 표현의 과장이나 언어의 빈곤이라기보다 어떤 지극함의 울림으로 와 닿았다.
자신의 사진책은 물론 한평생 모아둔 '아름다운 책'을 죄다 챙겨왔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처럼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사진과 책의 인연을 터놓는 그는, 사진가 구본창이다. 지난 5일 대학로 인문예술서점 이음아트에서 열린 <사진, 책으로 말하다> 첫 번째 주인공으로 초대됐다.
대한민국 대표 사진가, 책과 함께 '봄나들이' 가다이날 행사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씨에 의해 마련됐다. 책 중에서도 사진책은 활자가 전하지 못하는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한다. 훌륭한 인쇄와 양질의 종이, 아름다운 제본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진책은 많은 독자를 만나지 못한다. 이상엽씨는 이런 자리를 통해 사진책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며 <사진, 책으로 말하다>의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구본창씨는 <기쁜 우리 젊은 날>, <밀애> 등 영화포스터와 <백자>, <탈>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구본창씨가 갤러리 작가나 영화, 패션 등 상업사진 작가로 생각하지만 독일유학시절에 포토저널리즘을 공부하는 등 책 만드는 데 관심이 많은 사진작가입니다. 지금까지 모두 11권의 사진책을 펴냈거든요." 구본창씨는 늦깎이 사진가에 속한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샐러리맨으로 살다가 틀에 박힌 조직생활에 갑갑증을 느끼고는 이십 대 후반에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교로 사진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서울고-연세대 동기 동창인 영화감독 배창호씨의 소개로 영화 포스터 작업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사진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일분 간의 독백> 등 극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의식세계를 감각적 사진으로 표현함으로써, 사실주의 전통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국내 사진계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2000년 미국 휴스턴 포토페스티벌과 덴마크, 호주 시드니 등에서 한국 동강 사진전 등 다수의 기획전을 열었고 뉴욕, 동경, 파리, 베를린 등 국내외에서 20회 이상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로 꼽힌다.
"제가 사진책에 반하게 된 계기는 바로 이 책 <이조의 민화>입니다. 총 두 권인데 85년도 일본에서 우연히 보았지요. 우리나라에서 보지도 못한 책이 일본에 있더라고요. 한 권에 오십만 원이었죠. 그때는 돈이 없어서 엄두도 못 내다가 90년도가 넘어서 겨우 샀습니다. 이 책을 보고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사진, 브로셔, 그림... 평생 간직한 '오래된 탐미주의자' 지금 생각해도 흐뭇한지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괸다. 구본창씨는 이어 <생각의 바다> 등 국내에서 출간된 사진집과 일본서 나온 사진집 등 탄생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었다. 신경숙 씨와 공동 작업한 <자거라, 네 슬픔아>, 최인호씨와의 같이한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직접 디자인한 정해창 선생의 책, 사진집 <탈>의 시발점이 된 <한국의 나무꼭두> 등도 소개했다.
이외에도 11세 때부터 소장해온 '디자인이 아름다운 달력'과 '근사한 풍경사진', '멋진 브로셔' 등 그의 애장품이 줄줄이 엮어져 나왔다. 그는 "정갈하고 조형적 아름다움이 담긴 그림들이라서 이사를 수십 번 다니면서도 버리지 않았다"며 색이 바래고 귀퉁이가 다 닳은 그것들에 애착을 드러냈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운 사진과 그림들을 곁에 두고 보며 예술가로서 감수성과 심미안을 키웠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성장스토리는 계속됐다. 저마다 깊은 인연으로 얽힌 책, 그리고 사진은 한 편의 기록영화처럼 그의 일대기를 구성했다.
잠시 불을 끄고 그의 사진작품을 감상했다. 심은하, 황신혜, 김윤진 등 당대 여배우들의 포트레이트 작품, 초창기 한국걸스카우트연맹과 저축추진중앙위원회 포스터, 88올림픽 때 서울 풍경사진, 유학시절 독일여행 중 찍은 스냅사진 등을 선보였다. 다락방 속에서 꺼낸 친구의 앨범을 들여다보는 듯 흥미를 자아내는 사진들에 100여 명의 독자들은 숨죽인 채 빠져들었다.
독일유학서 조형적 훈련, 편집과 디자인 능력 키워2부는 작가와의 대화 및 사인회로 진행됐다. "도예과 석사과정인데 선생님의 백자 사진을 보고 영감을 얻고 있다", "북디자이너인데 책 만들 때 좋은 사진의 기준은 무엇인지 말해달라", "사진 디렉션의 접근 방법은 무엇인가", "이미지 독법에 대한 자신만의 잣대가 있나"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의 대답이다. "책에서 좋은 사진은 함축성이다. 책은 혼자서 하는 작업이 아니다. 괴롭고 번거롭지만 내가 못 보는 걸 다른 사람이 보는 경우도 많다. 좋은 디자이너는 좋은 자극을 준다."
구본창씨는 인쇄매체가 요구하는 편집과 디자인 등에 능한 사진가로 통한다. 그는 비결에 대해 '조형적인 훈련'이 시각적 구성능력을 키우는데 많이 도움이 됐다며 미학적인 훈련과 경험을 평소 착실히 쌓아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 유학 당시 대상을 관찰하는 방법을 아주 혹독하게 배웠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의자를 그리거나 찍을 때 우리는 의자만 생각하지만 독일에서는 의자를 둘러싼 바깥을 생각하도록 부단히 훈련했습니다. 또한 인물사진의 경우 눈코입 등 보이는 것만 찍으려 애쓰지 말고 동시에 양쪽과 전체를 봐야 합니다. 대개는 대상을 지식으로 해석하는데 어느 순간 지식을 버려야 합니다. 기존 관념을 버리고 제로에서부터 시작해서 새롭게 접근하고 관찰해야 이해하는 게 생깁니다."서릿발 같은 형형함과 무욕의 절제미, 실존에 대한 진한 연민이 공존하는 구본창의 사진은 이 같은 고된 감정훈련과 노동의 산물이었다. 어느 순간 셔터를 누르면 내 생각과 동시에 사진을 찍히는 느낌이 들더라는 '사진대가'의 고백에 힘차고 따뜻한 박수가 더해지면서 작가와의 대화가 마무리됐다.
사진문화, 소비돼야 재생산 된다 "갤러리도 대형서점도 아닌, 작지만 향기 있는 서점에서의 행사가 신선했다"며 "이런 자리가 너무 값지다"고 그는 평했다. 열화당에서 나온 사진가 시리즈 책자 1쇄 이천부가 나가는데 2년이 걸렸다면서 "사진작가의 작품집도 서태지의 신보처럼 판매 당일에 매진되는 날이 와야 한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이곳 이음아트에는 사진책 천여 권이 구비돼 있다. 대표 한상준씨가 원래부터 사진을 좋아해 개인적으로 모은 것이다. 한상준씨는 일본에 갔을 때 '문화의 깊이'를 보고는 놀래고 왔다며 우리도 한 겹 한 겹 층을 쌓고 넓혀가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획 및 사회를 맡은 이상엽씨도 "모든 문화는 소비돼야 재생산 된다"며 행사의 의미를 되짚었다.
"우리나라 디카인구가 천만을 넘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사진을 찍지만 사진집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비싸다는 이유를 대는데 사진책값은 BW필터 한 개 값에도 못 미칩니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사진책이 팔리기 시작했고, 1990년대부터 사진작품이 팔렸죠. 2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의 20~30대부터 조금씩 문화를 소비하고 누리는 풍토가 생겨나고 있죠. 이렇게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가까운 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진문화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날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작가 소장의 한정수량 작품집을 판매했다. 독자들은 한 권부터 너댓 권씩 골라 길게 줄을 서서 계산을 하고 작가의 사인을 받는 등 진풍경을 연출했다.
<In the Beginning>과 1회 전시 브로셔 등 모두 세 권을 구입한 이유진씨는 이로써 구본창 씨의 모든 작품집을 다 갖게 됐다며 기뻐했다. 구본창씨의 매력을 묻자 그는 '전달력'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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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깔끔하면서 울림이 있잖아요. 사진뿐 아니라 이런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주제에 맞게 전달하는 능력도 뛰어나세요. 너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적정선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시간도 딱 맞춰 마무리하시잖아요. 사진이랑 책을 완벽하게 준비해 온 것도 그렇고요. 최고의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아름답죠."구본창 씨는 제2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전시감독을 맡았다. 10월 28일부터 3주간 대구EXCO 등에서 열리는 행사 준비로 봄과 여름 두 계절을 바쁘게 보낼 듯하다. <사진, 책으로 말하다>는 이음아트에서 두 달에 한 번 정도 개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