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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맞으며 산길을 내려가는 등산객.
비 맞으며 산길을 내려가는 등산객. ⓒ 안병기

 

봄비는

사람을 함부로 적시지 않는다

저 사람이 이 지상에서

몇십 년이나 생을 꾸려 왔는지

누군가와 사랑하는 중인지 혹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후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전후 사정을 두루 헤아리고 나서

비로소 사람을 적시기 시작한다

 

봄비는

아무렇게나 사람을 적시지 않는다

지금 누군가와 사랑하는 중인 사람은

김 무럭무럭 솟아나는 가슴을,  

누군가와 이별을 나눈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은 

가슴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부위부터

슬슬 적시기 시작한다

나이 들어 매사가 시들해진 사람에겐 먼저

건조한 삶의 뿌리인 다리를 흠뻑 적신 다음

영혼의 창인 눈가로 가서 살짝 맺힌다

봄비는 그렇게 정해진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사람을 적신다

 

봄비 맞으며

계룡산 산길 걸어 내려가는 동안

내 두 다리가 흠뻑 젖었다


#봄비 #계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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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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