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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연주 장면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연주 장면 ⓒ 민중의소리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교향악단 '할레(Halle)'가 영국 리즈의 '리즈타운 홀' 무대 뒤편에 올랐다. 1600명의 청중과 텔레비전 방송 카메라가 집중하고 있는 무대 중앙, 그곳에는 자기 앞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만큼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한, 소년에 가까운 열여덟 살의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40년 넘도록 세계 유수의 피아노 스타들이 꿈꿨던 '리즈 콩쿨 2006' 결선 무대에 오른 김선욱. 그의 손이 내리친 폭발적인 피아노 연주가 할레의 협연을 끌어당기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온 세상에 퍼뜨렸다.

이 무대가 담긴 동영상을 본 필자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에 매료됐다. 동영상 마지막 부분에는 협연 후 무대 뒤로 들어오면서 "어메이징(Amazing)"을 연발하는 지휘자의 모습이 나온다. 심사위원들의 생각도 지휘자와 비슷했는지 김선욱은 리즈 콩쿨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1위를 차지했다.

'늙은 취향'의 피아니스트 김선욱을 만나다

'애늙은이!'

연주를 다 들은 필자에겐 약간은 짓궂기도 한 이 단어가 떠올랐다. 김선욱을 만난 김에 '원숙함'의 원인에 대해서 캐물었다.

"워낙에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때 찍은 단체사진을 보면 다들 어리게 입었는데 저는 갈색 구두에 주황색 셔츠, 회색 자켓을 입었어요. 지금도 무늬있는 옷은 안 입습니다. 단색 위주로 입죠. 물건을 살 때도 주위에서 저 보고 '늙은' 취향을 좋아한다고들 합니다."

음악적 원숙함에 대해 물은 필자에게 김선욱은 약간은 동문서답 같으면서도 솔직한 답변을 했다. 곧이어 김선욱은 리즈 콩쿨에서 4위를 차지했던 외국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칭찬을 한다. 결선에서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한 친구인데 롱 티보 콩쿨에서도 우승했던 실력자라고 한다. 이 친구의 연주가 너무 뛰어나서 자신이 1위를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애늙은이' 김선욱도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감정조절이 안된다고 한다.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음악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음악의 분위기 자체에 감정이 이입된다는 것.

김선욱은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기 보다는 '음악애호가'로 정의한다.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고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자신을 그냥 음악애호가라고 생각합니다."

임동혁, 손열음 등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 중에 라이벌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라이벌이라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어도 저 사람과 경쟁하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단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연에 대한 리뷰나 기사도 전혀 보지 않는다고 한다. 주변에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좋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자신은 신경 쓰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간다고 한다. 20대 초반의 젊은이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자세. 어떻게 보면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기 보다는 '음악애호가'로 정의하고 있는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리라.

평소에 주로 듣는 음악은 클래식. 200년, 300년 전의 구닥다리 음악이지 않냐, 최근의 새로운 음악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김선욱은 "록도 듣고 현대음악 음반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편해지고 싶을 때 듣게 되는 것은 언제나 클래식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선호하는 음악은 확실하다는 것이 그의 해명. 그런 그도 국악은 아직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한번 관심을 가지면 완전히 파고들어가는 스타일이라면서 훗날을 기약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주는 협연무대가 좋아

"독주회보다는 협연무대가 편합니다. 협연무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죠. 같이 연주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구요. 리허설하는 시간도 재미있습니다. 독주회를 준비할 때는 연주 전날까지 혼자서 연주해야 합니다. 외롭기도 하고 짜증도 나지요. 리즈 콩쿨 결선에서 연주했던 브람스 협주곡 1번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비중이 50대 50인 곡입니다. 혼자 돋보이려고 하거나 크게 치면 연주시간 50분이 걸리는 이 대곡을 끌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서로 배려하고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오케스트라 악보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협연할 때도 지휘자와 눈으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피아니스트 김선욱
피아니스트 김선욱 ⓒ 민중의소리

자신을 돋보이고 싶어하는 대부분의 젊은 피아니스트들과는 달리 김선욱은 함께 연주하는 즐거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그의 성향이 작용했는지는 모르지만 김선욱은 한 때 지휘자를 꿈꾸기도 했다.

어렸을 적부터 지휘자가 되고 싶어 했다는 김선욱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다섯 곡은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지휘하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악인으로도 2004년 7월에 타계한 전설적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꼽는다. 그가 타계한 후 1년 동안 사진 스크랩을 들고 다녔다는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이면서.

"피아노는 혼자 연주하면 되지만 지휘자는 다른 사람들의 연주를 통해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다릅니다. 피아노를 잘 친다고 지휘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요. 공부하는 내용도 다릅니다. 그동안 피아노를 열심히 했는데 갑자기 지휘로 바꾸려니 피아노에 대한 애정과 미련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아직 못 쳐본 곡도 많습니다. 그래서 지휘에 대한 꿈은 잠시 접었습니다."

피아노 연주에서 '원숙함'을 보여주는 김선욱은 나이답지 않은 원숙한(?) 생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늘어놓는다. 남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대학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한 언론에서는 일찍부터 술과 담배를 시작한 그를 '문제적 18세'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원숙함'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까지 닿아있는지 살짝 궁금해진 필자는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알다시피 한국 사회에서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천재적 재능이 있지 않고서는 엄청난 돈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돈 없는 사람은 음악공부를 하기 힘든 이 현실에 대해 김선욱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피아노학원에서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돈이 많이 들은 적이 없었지요. 빈민가의 아이들이 오케스트라를 꾸려서 연주한다는 베네수엘라의 얘기도 잘 알고 있지만, 저는 정말 중요한 것은 음악을 얼마나 내 몸같이 사랑하느냐 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는데, 쉬프가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의무도 직업도 아닌, 삶의 특권이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와 닿는 말이었어요. 정말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다른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국내에 좋은 선생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리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도 사제간의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면 레슨비를 많이 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첫째는 음악을 사랑하는 것, 둘째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 셋째는 음악을 한다는 자부심, 이것이 있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피아니스트가 모든 문제를 꿰뚫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필자는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가 이러한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주기를 은근히 바란다. 약간은 생뚱맞은 질문으로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좀 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될지 혹시 누가 알겠는가.

피아니스트라고 하루 종일 피아노만 칠 수는 없는 법. 연습하는 시간 외에는 공연을 보거나 인터넷을 한단다. 짬이 나면 책도 읽는데 취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서점에 가서 책의 맨 앞과 뒤를 보고 끌리면 사서 본다고 한다. 프로이트, 샤르트르, 칼 융 등의 좀 있어 보이는 책들도 읽어준다고 한다.

랭보와 칼융도 이해하며 살고 싶어

"지금 가방에 칼 융의 자서전이 있습니다. '나 이런 것도 읽어'라는 감정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책도 이해하면서 읽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랭보도 좋아했습니다. 사실 비행기 타거나 외국 갈 때는 책 읽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2005년에 콩쿨 준비로 여러 가지 유혹이 많은 한국을 떠나 8개월간 미국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김선욱은 콩쿨 우승의 대가로 또 한 번 해외 유배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4월달에는 4주 군사훈련을 갔다 옵니다. 군대 간다고 그러면 선배들이 때릴려고 해요. (하하하) 콩쿨 우승으로 병역혜택을 받았거든요. 7월 달에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한 달에 4~5회씩 연주회를 할 것 같습니다."

리즈 콩쿨 우승의 대가로 영국에서 바쁜 연주회 일정이 잡힌 김선욱에게 필자는 다시 한 번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클래식은 서양 음악인데 서양 사람들이 음악 자체보다는 동양 사람이 연주한다는 신기한 기분으로 보지는 않겠냐. 예를 들어서 서양 사람이 사물놀이를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우문에는 현답이 돌아왔다.

"뉴욕필의 아리랑 연주 보셨습니까? 참 좋았어요. 클래식은 서양에서 발명했지만 인간에게는 기쁨, 슬픔 등 국경을 넘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들이 있습니다. 문화는 다르더라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진짜 좋은 연주를 들으면 좋은 것입니다. 진짜 좋은 연주는 음악을 알든 모르든 간에 상관없이 감동을 줍니다. 그런 것이 음악이 가지는 힘인 것 같아요."

리즈 콩쿨 이후 전국으로 공연을 많이 다니는 그는 지방 공연에 오히려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한다. 서울 공연에서는 느끼기 힘든 청중들의 음악에 대한 순수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서울 공연에는 음악 외적인 이유로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지방 공연은 연주자 자신이 차이를 느낄 정도로 음악에 대한 진지한 열정이 느껴진다고.

 피아니스트 김선욱
피아니스트 김선욱 ⓒ 민중의소리

인터뷰를 마치고 얼마 후 운좋게도 김선욱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 그의 스승인 김대진 교수가 지휘하는 수원시향과 3월 13일 저녁에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협연을 한 것이다. 이날 연주한 곡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었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대화를 이루듯이 진행되는 곡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협연곡으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선택이다.

김선욱의 연주는 참으로 신기하다. 분명 그의 연주는 화려하지 않다. 또래의 임동혁이 매우 화려한 연주를 들려주는 데 반해 김선욱의 사운드는 매우 절제되어 있다. 반면 김선욱은 음 하나하나를 매우 소중하게 다룬다. 빠른 패시지에서도 그의 손가락을 떠난 음들은 하나하나가 매우 또렷하게 들린다.

여타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화려한 기교에 취해 음을 흘리듯 연주하는 경향이 강한데 비해 김선욱의 이러한 연주 태도는 그가 왜 리즈 콩쿨의 심사위원들에게 인정을 받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필자는 연주를 들으면서 김선욱이 존경한다는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의 소리가 떠올랐다.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청중들의 우뢰와 같은 갈채 속에 김선욱은 앙코르 곡으로 브람스의 왈츠를 들려주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세계적인 음반사와 계약을 하고, 유럽에서의 연주 일정이 잡히면서 김선욱이라는 이름도 세계에 알려질 날이 다가왔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나갈 날이 훨씬 많이 남아 있는 피아니스트 김선욱. 그가 앞으로 만들어나갈 한국 음악계의 미래, 아니 세계 음악계의 미래가 사뭇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말> 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선욱#피아니스트#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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