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에 아빠 엄마가 군산에 오셨다. 두 분은 곧장 동생 지현이네 집으로 가셔서 나는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않고 동생네로 갔다. 동생집 화장실에서 뒤늦은 세수를 하려는데 자지러지는 듯, 조 여사의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분간이 안 가는 소리였다. 물기도 닦지 않고 거실로 뛰어나갔다.
"느그 아빠가야…. 코미디여야…. 그런 코미디가 없씨야." 두 분이 버스 시간이 바뀐 걸 모르고 집을 나섰다가 터미널에서 2시간 동안 기다린 얘기였다. 평범했다. 차표를 사고, 안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한 옆 사람과 인사를 하고 나서는 머쓱해서 티 안 내고, '까분' 이야기였다.
폭소를 터뜨릴 만한 일이 아닌데도 엄마 웃음은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나도 자꾸 조 여사를 따라 웃었다. 카메라가 흔들렸다. 엄마는 요 근래에 얼마나 웃으셨는지, 작은 눈이 더 좁아져 있었다.
아파트 매입, 그냥 저질렀다
조 여사는 '아파트인'이 되었다. 올해 2월 말에 영광 법성포에 엄마 이름으로 집을 샀다. 원래 살던 시골집, 어느 면소재지에 살았던 방 5칸짜리 집, 어디 읍내에 있던 아파트는 모두 아빠 이름이었다. 조금자 여사의 이름은 몇억도 더 되는 아빠 빚을 갚을 때나 내세웠을 뿐이다.
각자 화장실이 두 개 딸린 집에 사는 우리 자매는 엄마를 생각하면 시렸다. 울컥, 하는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조금자 여사 앞으로 집을 사자고 맘 먹은 건 올해 1월이었다.
엄마가 하는 굴비 엮기는 명절을 앞두고 급박하게 돌아간다. 연휴가 코앞일 때는 절정으로 치달아서 잠 잘 시간도 없다. 쪼그려 일하는 몸이 펴지지 않고, 입에서 단내가 나는 조 여사는 "오메, 나도 인자 늙었는가비야" 하면서도 굴비를 엮는다. 가게 사장님에게 "오늘 하루 목욕도 하고 쉴라요"라고 하지 않는 게 의리를 나타내는 최고의 표현이다.
밤을 꼴딱 넘겨 일이 끝난 새벽 서너시, 콜택시도 부를 수 없는 시간. 엄마는 아직 버스도 다니지 않는 터미널에 혼자 있다. 쪽잠을 자고 나와야 하는데 엄마 집 목욕탕은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 셋집이라 거기에 들이는 돈은 아까울 뿐이어서 부엌에서 물을 데워 목욕탕으로 갖고 가서 씻는 거다.
우리 자매는 설에 친정집에서 한 밤 자고는 마음을 완전히 굳혔다. 영광군청에 다니는 막내이모에게 집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며칠 뒤에 법성포에 24평짜리 아파트가 나왔다. 엄마 아빠한테 가서 집을 보라고 했더니 좋다고 하셨다. 저질렀다. 사기로 했다. 엄마가 월급 받을 때마다 지현이에게 맡겨놓은 돈도 있었다.
사흘 내리 잔치... 그렇게 좋으실까엄마 집을 사러 간 날, 나는 태어나 가장 지독한 감기몸살을 앓았다. 기침도 멎질 않아서 운전을 하는데 전력질주로 달리다가 멈춘 것처럼 숨이 가빴다. 법무사 사무실과 영광군청을 거치는 동안 모르던 사람의 집은 조금자 여사의 집이 되었다. 나는 몸이 아파서 얼굴도 곱지 못한데 인상까지 쓰면서 엄마한테 '훈계'를 했다.
"엄마, 이번에는 진짜 보증 서면 끝인 줄 알아. 진짜야, 아빠한테도 안돼. 진짜로 또 그러면, 조 여사 얼굴, 다시는 안 봐."엄마는 마지막으로 살던 아파트가 넘어가자 남 부끄럽다고 경기도로 올라가 고시원에서 혼자 살았다. 조 여사가 뼈를 깎으며 새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일터에 다니는 게 행복하다 하시는 조 여사는 나한테 와서 '아는 사람' 누구 얘기를 했다. 정말 좋은 사람인데 처지가 짠하다고, 나보고 보증 좀 서라는 부탁을 하셨다.
조금자 여사의 집값을 치르고 나서도 돈은 들었다. 이사하고, 도배하고, 이것저것을 사야 했다. 우리 자매는 조금은 치사해져서 돈을 한꺼번에 보내지 않고, 아빠가 필요하다고 전화를 할 때마다 그만큼씩만 보냈다. 딸들의 복잡한 '꼼수'를 알 리 없는 부모님은 음지에 숨어있던 당신들의 친구들을 불러서 사흘 내리 잔치를 하셨다.
엄마 아빠는 이사 들어간 집이 너무너무 좋다고 하셨다. 햇빛도 잘 들고, 집 앞의 포구에서는 새벽에 도깨비시장도 잠깐씩 선다 했다. 베란다에는 선사(선물)로 들어온 철쭉도 예쁘게 피어있고, 거실 벽에는 엄청나게 멋있는 그림도 있다고 했다. 아빠는 날마다 집을 쓸고 닦는다고 하셨다.
전화기로 들려오는 '자가인' 조 여사의 목소리는 활기찼다. 우리 자매는 그토록 조금자 여사의 이름으로 된 집을 사 주고 싶었으면서도, 보러 가지는 않았다. '혼인한 딸이 이만큼 하면 된 거 아닐까' 생각했다. 주말마다 나 좋을 대로 쉬고 돌아다녔다.
"내 등산 신발이, 폼이 안 나야"
그러는 사이에 꽃망울이 맺혔다. 엄마는 일이 없는 일요일, 군산에 꽃을 보러 오고 싶다고 하셨다.
조 여사는 토요일 밤 늦게까지 일을 하셨다. 일요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딸들 먹을 나물반찬을 하고, 손자와 사위들이 먹을 갈비를 재우고, 짐을 챙기셨다. '쇼핑목록'도 정해 오셨다. 먼저, 집 앞에 나갈 때 가볍게 신는 '쓰리빠'부터 사기로 했다. 엄마하고 지현이만 가고, 나는 아빠하고 차 안에 있었다.
"아빠도 뭐 필요하면 말해.""(머뭇머뭇) 신발이 없씨야.""구두도 새 거고, 나이키 운동화도 사준 지 얼마 안 됐잖아.""아니, 법성포에 산악회가 있는디 들고 싶어도….""엉? 저번에 등산옷 다 사 줬잖아.""아니, 등산 신발이, 내 것은 폼이 안 나야.""푸하하하하!"조상 대대로 내려온 허영심은 아빠 대에서 끝나지 않았다.우리 자매들도 스타일이 별로인 날에는 집으로 어서 돌아가고만 싶다. 아침 조회 때 운동장 한가운데서 넘어진 것처럼 혼자 속으로만 두고두고 '쪽팔린다'. 그래서 나는 아빠를 북돋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어? 걱정하지 마."아빠 등산 신발을 샀다. 내쳐서 엄마 운동화도 사고, 아빠 등산 자켓도 샀다. 5월에는 친구 분들이랑 제주도 여행을 간다 하시길래 커플 모자도 맞추어 샀다. 우리 부모님은 입성을 꾸미는 물건을 살 때, 사양한다는 말이나 손사래가 존재하는 걸 모르고 계신다. 언제나처럼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권하는 대로 받아들이셨다.
쇼핑을 마치고, 우리는 흔한 꽃놀이처럼 사람 속을 걸어서 꽃길을 걸었다. 아빠 말 한 마디에도 웃음보가 터지는 엄마를 보며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부모님의 다정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법성포의 아파트가 궁금해졌다. 조 여사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면서 보면 되겠지 싶은데 어느새 엄마 아빠는 전형적인 시골 부모님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여야, 내 딸 피곤해서 못 쓰제. 버스 타믄 되는디, 괜찮해야." 버스터미널에서 헤어져 집으로 오면서, 질질 짜며 세 번 연달아본 영화 <우리학교>를 생각했다.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으로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나는 소중하니까"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동포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하여 살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한다. 아이들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내가 자라 밥벌이를 하고, 좋아하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온전한 내 힘이 아니다. 12개월 할부로 책을 들여놔 주고, 시골에 살면서도 도시의 동물원에 데려가고, 바리바리 먹을거리들을 싸서 해수욕장에 데려간 부모님이 있었다.
몇 번이나 가진 것을 모두 잃었을 때도,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할퀴지 않고, 몸이 닳는 일을 하며 우리를 키워주신 엄마.
끝장나는 섹시미를 타고나지 못해서 섭섭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머리에 꽃을 꽂고 리듬을 타며 튕기듯 걸어도, 나한테는 '광녀' 티가 덜 난다. 있는 힘을 다해 얼굴색을 바꿔가며 보리피리를 불어도 나름 고급스럽다.
나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나이 예순까지 셋집에 살았지만 허영심과 유머를 잃지 않은, 당신들이 나를 이루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