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산> 덕분에 정조 임금의 정치철학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백성들의 민의를 직접 살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최근 드라마 내용 중에 이산은 임금이 된 후에도 백성들의 여론을 살피기 위해 몰래 변장을 하고 잠행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하는 군주였음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역사적 사실 속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정조 시대에 이르러 백성들의 민원을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호원제도(呼願制度) 제도인 '격쟁(擊錚)'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이다. '격쟁'은 임금의 행차 길에 징이나 꽹꽈리를 치면서 시선을 집중시킨 후 백성들이 직접 왕에게 민원을 호소하는 방법이다.
정조 이전에도 격쟁제도는 존재했다.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의 유명무실화를 극복하고자 격쟁제도(擊錚制度)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궁궐의 안팎에서만 제한적으로 시행되어 임금에게 백성들의 민원이 직접 전달되기 어려웠다. 정조 대에 이르러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시작된 능행시(陵行時)에 백성들의 격쟁을 허용하여 거리에서 격쟁을 올리는 것이 합법화되었다. 이때부터 정조의 능행길에는 으레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격쟁을 통해 민원 해결을 시도하게 된다.
격쟁과 관련해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정조 이산과 흑산도 사람 김이수의 만남을 들 수 있다. 절해고도 흑산도에 살던 김이수(金理守)라는 평민이 섬 주민들의 민원 해결을 위해 천리만길 한양까지 찾아와 격쟁(擊錚)을 올리자, 정조는 흑산도에서 한양까지 올라온 섬사람 김이수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시정하였다.
김이수(1743~1805. 생몰년은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음)는 현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부속 대둔도)에 살면서, 섬사람들의 민원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름 난 학자도 아니고, 관직 생활을 하던 정치인도 아니었다. 다만 불합리한 세금 제도로 섬 주민들 부담이 가중되어 흑산도를 비롯한 인근 주민들이 참혹한 생활을 겪게 되자, 민중의 대변인이 되어 개혁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김이수의 활동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1791년 정조 임금의 행차를 가로막고 격쟁을 올린 일이다. 그는 당시 흑산도 주민들이 겪고 있던 가장 큰 폐단인 '닥나무(종이 제작재료) 세금'을 시정하기 위해 관청이나 상부에 소송을 내고 수차례 시정을 요청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최후의 수단으로 한양까지 찾아가 임금에게 직접 개혁을 호소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200여년 전 절해고도로 인식되던 흑산도에서 망망대해를 거쳐 한양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고행의 길이었다. 그가 바람에 운명을 맡긴 '풍선배'에 몸을 맡기고, 한가닥 희망을 품고 한양으로 향해갈 수 있었던 것은 정조 임금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김이수 문중에 남아 있는 기록에는 그가 한양으로 '격쟁'하기 위해 떠나기 전에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듣기가 어려운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되어 있다. 결국 김이수의 격쟁은 '민중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현군(賢君)이었던 정조 임금에게 받아들여졌고 이에 대한 폐단이 시정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관찬사서에 기록되어 있어 그 역사적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격쟁 제도와 관련하여 많은 신하들이 부작용을 예로 들어 폐지하거나 방법을 달리할 것을 청하였다. 횟수에 제한이 없어서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격쟁을 올리는 사례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일관되게 격쟁제도(擊錚制度)를 유지하였다. 권위적이고 군림하는 왕이 아닌 몸소 백성의 곁으로 찾아가는 정치를 한 것이다. 민중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정조의 정치철학을 후세들이 본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정조 이산과 흑산도 사람 김이수가 격쟁을 통해 만나는 장면이 드라마 속에서 연출된다면, 정조의 정치철학을 더욱 실감나게 표현하는 장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가져본다.
덧붙이는 글 | 최성환 기자는 신안문화원 사무국장, 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강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