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이 대북정책과 관련 광폭 행보를 선보이고 있다. 이 대통령은 17일 오전(현지시각)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남한과 북한이 지속적으로 대화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에 연락사무소와 같은 상설 대화기구를 제안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어 연락사무소 책임자 인선에 대해 "양측이 협의할 사안이긴 하지만 최고책임자에게 말을 직접 전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의 '남북 연락사무소 설치' 제안은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게 청와대측의 설명이다. 이동관 대변인은 "그동안 북핵문제 해결과 북한 주민의 실질적 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북한과 대화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혀왔고, 이번 제안은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에 따라 남북관계는 물론 수개월째 교착상태에 있는 북핵 협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도발적인 발언 등 남북간 긴장관계가 이어지고 있어, 당장 연락사무소 개설 등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대통령은 전날(16일) 반기문 UN사무총장을 만난 자리에서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이 북한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대통령의 연락사무소 개설 제안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취할 지 주목된다.
"저 역시 이전 대통령과 매우 다르다... 영구적인 대화 채널 필요""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오늘 서울과 평양에 첫 연락사무소 개설을 포함해 남북한 사이에 고위급 외교 채널의 구축을 제안할 것이라고 말했다."17일 WP의 이 대통령 인터뷰 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WP는 "미국은 오랫동안 한국이 이 조치를 취해줄 것을 촉구했지만, 한국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이를 제안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다음은 WP 홈페이지 오디오 클립에 올려져 있는 이 대통령의 남북 연락사무소 제안 부분 발언록이다.
"남북한 관계는 예전과 비해 차이가 있다. 북한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 (동일한) 한국 정부를 상대했다. 지금 그들은 새로운 정부를 상대하고 있으며, 새로운 정부는 이런 정부와 매우 다르다. 저 역시도 이전 대통령과 매우 다르다. 그래서 저는 이 같은 적응기간 동안 남북한 간 대화가 원만치 못했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한국과 저에 대해 호전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남북한 모두가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북한이 그들의 오랜 방식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남북한은 영구적인 대화 채널을 열기 위해 지속적으로 대화할 필요가 있다.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대화가 단절될 수도 있었다. 이는 현재 상황에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이번 방미를 마치고 귀국하면 서울과 평양에 영구적인 연락사무소 설치를 제안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영구적인 대화 채널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이 제안의 목적은 핵문제를 항상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남북관계 논의를 위한 대화 채널을 열어두게 될 것이다."이동관 대변인은 이 대통령의 연락사무소 개설 제안 배경과 관련 "남북간에 전략적인 접근이 아니라 내실있고 실질적인 (관계) 진전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그 연장선에서 오랫동안 구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형식적으로 만들어놓고 대화가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식의 형식적인 기구가 아니고, 실질적이고 상시적인 기구가 되려면 최고지도자와의 연락이 되어야 하는 인선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구체적인 인선 대상을 염두에 두고 제안한 것은 아니라고 이 대변인은 전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은 WP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식량위기 도래설'에 대해 "본격적인 경제협력 문제는 비핵화 진전과 연계되지만 북한 주민들의 식량 위기는 인도적 지원 문제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경제협력과 구분돼야 한다"며 "식량지원은 인도적 문제로 (경제협력과 별도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이동관 대변인은 ▲ 비핵화 진전에 따른 단계적 지원 ▲ 경제적 타당성 ▲ 재정 부담 능력 ▲국 민적 합의 등 대북 경협 4원칙을 제시했다. 이 대변인은 또 "인권 문제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차원에서 접근하겠다는 원칙적인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탈북자 문제 제기하고 연락사무소 제안하고... 북한의 입장은?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북한의 수용 여부다. 청와대측은 연락사무소 제안에 대해 이 대통령이 오랫동안 구상했다고 강조하면서도 이를 발표하기 전까지 북측과 어떤 물밑협상도 진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동관 대변인은 "북측에 사전에 양해를 구하거나 의견 접근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전에 북한과 교감해서 나온 산물이 아니다"며 "'대화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을 (이 대통령이) 지난번 기자회견에서 얘기했고, 그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대북접근의 원칙은 "진정성과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관계의 정립"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이 대변인은 특히 "북한이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으로 검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북한이 진정성을 가지고 한다면 이런 건설적인 제안을 거부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대변인은 "남북간의 대화 채널은 단순히 경협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인권 등에 대해서도 상시적으로 논의하자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최근 북한은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대북정책인 '비핵·개방 3000' 구상을 전면 거부한 채 도발적인 표현까지 동원하며 냉각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이 경협 등 모든 남북 문제를 핵문제 해결과 연계시키고 있고, 한미관계를 남북관계에 우선한다는 원칙론을 고수할 경우 북한이 쉽게 이 대통령의 손을 잡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 대통령은 WP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최근 언동에 대해 "새 정부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겠지만 4월9일 총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전략으로 본다"고 일축한 뒤, "과거 정권은 남북 관계를 6자회담을 통한 핵 해결보다 중요시 했으나 새 정부는 한반도 핵포기에 중점을 두고 6자회담 협상과 보조를 맞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미관계나 북핵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가 주도권을 쥘 수 없다는 점에서 "한미관계가 좋아지는 것이 남북관계에 도움이 된다"는 이 대통령의 발상 자체가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이 대통령이 '한미동맹 복원'을 목적으로 방문한 미국에서 북측에 연락사무소 개설을 제안했다는 점도 선뜻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게다가 반기문 UN사무총장을 만나 북한의 탈북자 문제 해결을 요청한 지 하룻만에 북측에 '상시적이고 실질적인' 대화기구를 제안해놓고 "북한이 진정성이 있다면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북한으로서는 이 대통령의 탈북자 언급이 '내정 간섭'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북한에 대해 배려를 할 수는 있지만 분위기를 좋게 하는 게 남북대화의 목표가 될수는 없다"며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북한 인권 문제는 원칙대로 언급한 것"이라고 말해,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대북 경협 4대 원칙이나 '비핵·개방 3000' 구상을 밝혔지만 아직까지 '구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이명박 정부는 어떻게 경협을 추진하겠다는 것인지, 북한이 300만달러짜리 수출기업 100개를 어떻게 양성할 수 있다는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못 내놓고 있다. 북한이 어떤 입장을 취할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