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론가 정윤수씨의 블로그(blog.ohmynews.com/booking) 글을 읽다가 4월 16일이 찰리 채플린이 태어난 날이란 걸 알았다.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이자 광대인 찰리 채플린, 그가 태어난 바로 그날 채플린의 후예인 러시아 광대예술가들이 서울을 다시 찾아왔다.
러시아 예술가 슬라바 폴루닌이 연출한 <스노우쇼> 공연팀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번이 다섯번째다. <스노우쇼>는 2001년 국내 첫 공연 이후 6만 여 명의 관객을 순백의 감동으로 웃기고 울렸던 작품이다. 이미 3월부터 전주 광주 대구를 돌며 관객과 행복한 만남을 가져왔다.
자신의 몸을 악기처럼 연주하는 광대들서울 공연 둘째 날 아내와 함께 한전아트센터를 찾았다. 극장에 들어서니 무대와 객석 바닥에 작게 직사각형으로 잘라낸 흰 종이들이 눈처럼 소복이 쌓여 있다. 무대 위에는 별들이 점점이 박힌 파란 하늘 배경들이 천정에서 내리워져 있다. 어디선가 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암전.
조명이 다시 들어오고, 무대 한 편에서 빨간 주먹코에 헐렁한 노란 옷을 입은 피에로 분장의 광대가 등장한다. 그의 손에는 밧줄이 들려 있다. 그는 밧줄의 고리를 자신의 목에 걸고 천천히 당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밧줄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당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긴장이 웃음으로 바뀐다.
결국 끌려나온 밧줄의 끝에는 또 다른 광대가 똑같이 고리에 목을 걸고 있다. 그 광대는 2미터 가까운 키에, 잠자리날개 모양의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연두색 외투를 입고, 새의 부리처럼 길게 뻗은 신발을 신었다. 서로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한다.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엮인 것일까. 이후 1시간 10분 동안 펼쳐질 환상의 세계는 그렇게 막을 올렸다.
홀쭉이와 뚱뚱이 또는 거꾸리와 장다리를 닮은 두 광대는 다른 네 광대와 어울려 서로 만나고, 기뻐하고, 장난치고, 사랑하고, 다투고, 헤어지고, 아파하는 외로운 영혼을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작은 광대에게선 채플린 영화 속 떠돌이의 모습이 비치고, 큰 광대에게선 '태양의 서커스'의 퀴담이 겹쳐 보인다. 또한 그들은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져 하염없이 누군가를, 무언가를 기다리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 같기도 하다.
<스노우쇼>에는 대사가 없다. 몇 마디 대사가 나오나 언어가 아니라 그저 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그 의미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심지어 눈빛의 작은 떨림에서조차 그들의 기쁨과 슬픔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문득 바벨탑의 신화처럼 오히려 언어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소통에 장애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같은 소통은 물론 얼굴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온몸을 단련시켜 악기처럼 연주하는 배우들의 마임에 크게 힘입고 있다. 러시아민요 '푸른 카나리아'를 노래하는 거리의 악사들은 음의 높낮이에 따라 자신의 몸을 아코디언의 주름상자처럼 접었다 펼쳤다 한다. 몸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그 신비한 체험을 글로 제대로 옮길 수 없어 안타깝다.
또한 상황과 절묘햐게 어울리는, 또 친숙한 배경음악의 선택이 극적인 효과를 더욱 크게 부풀린다. 광대가 끌고 나온 침대가 보트로 변해 거친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시작할 때는 영화음악 '불의 전차'가 긴박감을 더하고, 실연의 아픔에 술병을 앞에 두고 괴로운 밤을 지새우는 장면에선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그 고독을 더 짙게 만든다. 세찬 바람과 거친 눈보라에 맞서는 주인공 광대의 마지막 모습은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브라나> 중 '운명의 여신이여'로 인해 더욱 비장하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스노우쇼>의 광대는, 모든 광대가 그렇듯 당연히 익살맞다. 그렇다고 억지 '몸개그'로 웃음을 강요하진 않는다.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공연 내내 극장을 가득 채운다. 아이들의 영혼이 더 순수한 까닭일까. 아이들의 "꺄르르" 소리가 터지고 바로 뒤를 어른들의 "키득" 소리가 따르는 게 흥미롭다.
그러나 광대의 익살과 웃음 뒤에는 우수와 눈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광대의 우스꽝스런 몸짓조차 애틋하게 느껴진다. 그들의 얼굴 분장도 슬픈 웃음을 머금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이와 작별하면서 옷걸이에 걸린 옷으로 1인 2역의 마임을 보여주는 장면은 아름다우면서도 가슴이 저릿하다. 몇 년 전 서울공연 때 이혼을 앞둔 부부가 함께와 이 장면을 보며 아내가 펑펑 울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스노우쇼>는 시적이고 철학적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비눗방울이 무대에서 객석으로 퍼져나간다. 잠자리채를 든 광대가 비눗방울을 잡기 위해 애를 쓴다. 잠자리채에 닿는 순간 비눗방울은 덧없이 터져버린다. 또 광대가 빗자루로 거미줄을 걷어내려 한다. 그러다 거미줄이 몸에 엉킨다. 벗어나려고 허우적댈수록 거미줄은 더욱더 몸을 옭아맨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지 않던가.
<스노우쇼>에는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다. 광대들은 관객들과 어울려 눈싸움(실제론 흰 종이)도 하고 공놀이도 한다. 비눗방울이 객석 위를 떠다니고, 거대한 거미줄이 객석을 덮치고, 눈보라 폭풍이 눈 뜨기 어려울 정도로 객석을 휘몰아친다. 실제로 광대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을 타넘으며 물을 흩뿌려대기도 한다. 그런데, 물을 맞아도, 즐겁다.
어른도 아이도 구별이 없다. 모두가 동심으로 한마음이다. 마흔 중반을 넘긴 나 역시 애드벌룬을 한번이라도 더 쳐보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이고, 바닥에 쌓인 흰 종이를 눈처럼 뭉쳐 배우들에게 던져댔다. 옆자리를 힐끗 보니 아내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연신 눈송이를 주워 흩날리고 있다. 동요의 노랫말처럼 이 순간만큼은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하얄 것임에 틀림없다.
눈보라와 함께 환상의 세계로의 여행은 끝이 났다. 이제 마법이 풀려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늦추고자 하는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머리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색색의 애드벌룬과 풍선들을 끊임없이 하늘로 튕겨올릴 뿐이다. 집에 돌아와 옷을 벗다보니 주머니 속에서 흰 종잇조각들이 나왔다. 감동의 여운은 그렇듯 극장을 벗어나서도 이어졌다.
찰리 채플린은 우리에게 "여러분은 인생을 자유롭고 아름답게 할 힘을 가졌다"고 일깨워줬다. 일상에 파묻혀 잃어버린 그 힘을 되찾기 위해 아이의 손을 잡고 눈보라를 맞으러 가보는 건 어떨까. 덧붙여 공연 팁 하나. 비눗방울도 터뜨리고, 애드벌룬도 튕겨보면서 공연을 100% 즐기려면 아무래도 1층 앞자리가 좋다. 하지만 드라이아이스가 만들어내는 안개에 자주 휩싸이기도 하니 호흡기가 좋지 않은 아이와 함께라면 피하는 게 좋을 듯.
<스노우쇼>는 서울 한전아트센터에서는 20일 막을 내린다. 이어 성남(성남아트센터·4월 23-27일), 고양(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5월 1-5일)의 관객을 만난 뒤 다시 서울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5월 8일부터 11일까지 공연한다. 문의전화 1544-3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