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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로신학대학교 교정에서 만난 김동수 교수. 웃는 모습이 환하다.
장로신학대학교 교정에서 만난 김동수 교수. 웃는 모습이 환하다. ⓒ 김귀자

"이게 (인터뷰 할 정도로) 그렇게나 대단해요? 허허, 난 몰랐네."

미국 버지니아주 노폭주립대에서 27년간 교수로 지내고 은퇴하고 45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김동수 교수. 그가 수필가로 등단했다. 백범 김구 암살에서 장례까지 과정 묘사한 수필 <큰 별 지다>가 월간 <에세이 플러스> 주최 수필 공모에 당선된 것. 

"이 나이에 이름 날릴 것도 없고, 그냥… 싫진 않습디다. 첨엔 내가 (글재주가) 아주 모자라라서 등단하라고 주위에서 권하는 걸 사양했다고. 그런데 글재주보다 중요한 메시지가 있으면 된다고 해서 등단했지요. 사실 그 전엔 등단이 뭔지도 몰랐어."

자그마한 키에 머리가 희고 수염이 덥수룩한 노교수의 볼에는 웃음이 한가득 물렸다. 호기심 많고, 잘 웃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오랫동안 한글권에 벗어나 생활한 탓에 단어며 표현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했지만, 그의 글에는 미사여구보다 강한 세월이 주는 힘이 실려 있다. 백범 김구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경험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늘 글이 쓰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시작했다는 노교수는 느지막이 글 쓰는 재미에 빠져버렸다. 

백범 김구는 내 생애 유일한 '할아버지'

김동수 교수는 평남 덕천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김예진 목사의 6남이다. 부친이 김구·안창호·이시영·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그도 백범 김구 선생을 접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이번에 수필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에도 그런 경험을 생생히 담아냈다.

"내게 김구 선생은 위대한 애국자보다는 좋은 할아버지였어요. 내 생애 단 한 분밖에 없는 할아버지였으니까. 친근한 할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존경했지요. 경교장(백범 김구가 환국 후 머물러 살다가 암살된 곳)에 갈 때마다 과자를 줬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고급이었어요. 아주 좋았지."

김 교수는 자신이 기억하는 김구 선생을 수필로 옮겼다.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기 바로 며칠 전에 "갖다가 잘 건사하라"며 사진을 한 장 준 것이며, 장례식에서 관이 나갈 때 사람들이 다 울었던 것 등 오래 전 일이지만 당시 장면들이 아직도 눈에 훤하다. 이처럼 그에겐 아직도 꺼내지 못한 추억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그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숭실대를 졸업한 김동수 교수는 1961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나라가 무척 어려웠던지라 젊은이가 진출할 기회는 유학뿐이었다. 잠깐일 줄 알았던 미국행이었지만 그가 다시 한국으로 오기까지는 45년이 걸렸다.

그는 아버지와 김구 선생의 영향으로 민족 화해와 민주화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유신 정부 때 반독재 운동을 벌이다 한국 정부에 찍히는 바람에 들어오지 못했고, 전두환 정부 시절엔 한국에 왔다가 공항에서 바로 추방령이 내려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뒤로는 간경화로 몸이 아파 오지 못했다.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10여년 전 이식 수술을 받고 간신히 살아났다.

뒤늦은 수필가 등단... "말년에 도 닦아요"

 검은 머리의 젊은이는 흰머리가 되어 45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검은 머리의 젊은이는 흰머리가 되어 45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 김동수
김 교수의 몸은 비록 삼만 리 타국에 있었지만,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을 벌이며 한국사의 한 켠에 서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글'로 말하고 싶다.

"내가 이 나이에 글을 써서 이름을 날릴 가능성이 있겠소? 다만 내가 믿는 바, 신앙과 실천 같은 걸 재밌는 글로 전달하고 싶다는 바람이지. 내가 투병하면서 느낀 거나 반독재와 통일 운동하면서 생긴 에피소드 이런 거, 특히 분단의 아픔에 대한 글을 많이 쓰고 싶어요. 그러면 내가 풀지 못했던 걸 다른 사람들이 풀 수 있지 않을까."

뒤늦게 글맛을 안 그는 밤마다 글을 쓴다. 늦은 밤 자신의 오랜 기억을 되새김질하듯 퍼올린다. 일기를 꾸준히 쓴 건 아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기억이며 이런 것들이 세세히 저장돼 있다.

김동수 교수 본인이 고백하듯, 그의 글은 화려한 미사여구도, 빠르게 읽히는 재미도 없다. 하지만 그가 온몸으로 겪어낸 살아 있는 경험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솔직함과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의 최대 무기다. 인터뷰하면서도 자신을 미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몇 줄만 써보라며 말하던 그다.

"예기치 않았지만, 말년에 도를 닦는 기분이에요. 수필은 내가 경험한 것을 솔직하게 풀어놔야 하니까. 나 자신이 정직하지 않으면 좋은 글이 될 수 없지요. 글을 쓰면서 수양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김동수 교수는 횃불트리아니신학대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병 때문에 일 년에 반만 활동하고 나머지 절반은 미국에서 지내고 있지만, 학생들과 토론하고 공부하는 게 무척 재미있다고. '한국에서 가르치고 싶다'던 오래 전 꿈을 지금에서야 이룬 셈이다. 대학교에서 젊은이들과 섞여 지내니, 마음이 늙을 새가 없다. 지금도 새로운 것을 보면 한번 해봐야지 한다. 스스로 한계를 짓지 않는 마음이 노년에도 수필가로 등단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우리집 다락방에서 오마이뉴스가 태어났죠"

사실 김동수 교수는 <오마이뉴스>와 인연이 있다. 시민기자로 활동하면서 북한 인권법에 대한 분석 기사를 몇 편 썼고, 2005년 세계시민기자 포럼에선 가장 연장자로 통역 자원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김동수 교수는 <오마이뉴스>가 자신의 집 다락방에서 탄생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오연호 대표와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어요. 오 대표가 미국에 유학 왔을 때 우리 어머니 회고록을 같이 정리했지. 독립투사셨던 남편 때문에 고초가 여간하지 않았거든요. 95년인가, 두어 달 오 대표가 우리집에서 지냈지. 그 때 오 대표가 우리집 다락방에서 <오마이뉴스>를 구상했다고,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당시에 그걸 생각했다는 게 놀라운 일이지요. 누구나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거, 언론의 진정한 민주화는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때만 해도 이메일을 주고 받는 게 전부였는데 시민들이 기자가 돼 기사를 공급한다는 생각은 '대혁명'이었다며 김 교수는 흥분했다. 당시엔 기술이 받쳐줄지 확실치 않았는데, 지금 오마이뉴스가 자리잡은 걸 보면 뿌듯하다고. 자기에게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인생 문제를 상담해 주는 칼럼을 써보고 싶었다며 아쉬워했다.

팔팔한 젊은이로 한국을 떠나 백발성성해져서야 다시 한국에 돌아온 김동수 교수. 올해 일흔두 살임에도 스스로를 '간 큰 젊은이'라고 우기고 있다. 비록 머리는 다 희고 수염도 덥수룩하지만 백세주(白歲酒)를 마시며  나이를 따진다면 아직 스물 여덟 해가 모자라니 젊은이가 아니냐는 거다. 10년 전에 죽을 뻔했는데 새 생명을 받아 살아났으니 또 젊은이라는 소리다.

젊은 만큼 그에겐 할 일이 많다. 수필집도 한 권 내고, 그동안 써둔 시들을 다듬어 시선집도 내어보고 싶다. 무엇보다 학교를 통해 남북교류의 밑거름이 되는 사업을 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끊이지 않는 행보에 '도전'이란 말을 갖다 붙이는데, 정작 본인은 도전을 어떻게 생각할까?

"글쎄, 이제와 글 배워서 뭘 하겠느냐고 하는데 내 글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나도 하면 되겠다'는 용기가 생기지요. 육체적으론 기운이 딸리고 제한이 있지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는 거. 그게 도전이지요."

얼마 전 자신의 이력에 수필가를 새로이 추가한 노(老)교수. '간큰 젊은이'가 확실하다.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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