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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아련한 슬픔에 젖게 하는 노래 '봄날은 간다'

올해도 봄날이 중중모리 걸음으로 바삐 흘러가고 있다. "이젠 피어난 꽃을 보는 일도 질렸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시간이 흘러가는 걸 봄날이 저만치 가는 걸 어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돌이켜 보면 젊었을 적엔 흘러가는 시간마저 '버르장머리 없던' 시절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뇌만 홀로 깊어지던 때였다. 그런데 어쩌자고 시간은 그리 느려터졌는지! 어서 세월이 흘러서 늙었으면 좋겠다, 늙어서 아예 죽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난 이제 더 이상 세월에 대해 "망할 것아! 좀 빨리빨리 갈 수 없니?"라고 저주를 퍼부을 수 없는 처지가 돼 버렸다.

어느새 마치 늙은 파우스트라도 된 듯이 "제발 더디 가라!"고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할 나이가 돼 버린 것이다. 이젠 내게 시간은 '통증'이다. 아니, 시한폭탄이다. 애써 귀 기울이지 않아도 내 몸이 내는 제깍제깍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질 놈의 봄밤은 왜 이리 사람을 쓸쓸하게 맹근다냐.

어쩌면 이런 날엔 노래라도 한 곡조 들으면 기분이 좀 나을지도 몰라. 그럼 어디 한 번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라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써 볼꺼나. 쓸쓸한 노래로 내 마음속 쓸쓸함을 치유하리라.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라고 투정부리는 단가 <이산저산>이나 들을까. 아니지. 이런 날엔 누가 뭐래도 뽕짝이 제격이야. 그래, 맞아.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있지. 목소리가 죽여주는 한영애의 노래를 들을까, 아니면 미모가 죽여주는 김윤아의 노래를 듣는 게 좋을까. 한영애보다 김윤아가 부르는 <봄날은 간다>가 더 땡긴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 김윤아 <봄날은 간다> 노랫말 부분

 영화 <봄날은 간다>
영화 <봄날은 간다> ⓒ 싸이더스

노래를 듣다 보니, 영화 <봄날은 간다>의 몇몇 장면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겨울에 만난 은수와 상우의 관계는 봄을 지나고 여름을 맞으면서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이별이 찾아온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상우에게 은수는 그저 "헤어져"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사랑도 결코 제행무상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물(一物)이라는 걸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우.

어색한 악수를 청하고 돌아선 은수가 몇 발짝 걸어가더니 문득 생각난 듯이 뒤돌아 본다. 사랑하는 동안 자신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버리고 떠나기가 차마 미안했을까. "어쩄든 여자가 나빴어!" 난 어느샌지 모르게 상우 편이 되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내가 마치 상우라도 된 듯 마음이 아려온다. 김윤아의 노래를 끄고 이번엔 한영애의 시디 <Behind Time>을 튼다. 역시 장맛과 노래 맛은 오래 묵을수록 좋아. 흐흐흐…. 한영애의 청승은 문화재급이거든.

많은 시인이 같은 제목으로 앞다투어 시를 썼다

몇 년 전이었던가. 우리나라 굴지의 출판사인 문학사상사가 우리나라 시인들에게 흘러간 옛노래 가운데 어떤 노래를 가장 좋아하는지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단연 1위로 뽑혔다고 한다. 그런데 시인들은 왜 이 노래를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 <봄날은 간다> 백설희 노래·손로원 작사

내가 보기엔 이 노래 속에 숨은 그리움을 자극하는 장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황당·청노새·역마차 등을 그리움의 매개로 삼아 "휘날리더라" "흘러가더라" "슬퍼지더라" 따위의 회상형 종결어미들이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자던 추억을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노래를 듣는 사람은 어느결에 인생의 꽃 시절에 해당하는 열아홉 살의 시점으로 돌아가 아련한 슬픔에 잠긴다. 그러니 감수성 예민한 우리나라 시인들이 어떻게 이 노래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그친 게 아니다. "우리가 이 땅의 시인된 자로서 어찌 얌체 같이 노래만 듣고 입을 싹 씻겠느냐. 시로써 한 번 화답해 보자"라는 연판장이라도 돌렸던 것일까. 김명인·황동규·이승훈·고재종·김종목·기형도·허수경·조용미·권현형 등 이 땅의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와 같은 제목으로 시를 썼다. 어쩌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어디선가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 있는 지도 모른다.

안도현의 시 대(對) 김은령의 시

내 컴퓨터 C 드라이브엔 몇 년 전에 만든, <봄날은 간다>라는 시를 모아 놓은 폴더가 있다. 쓸 만한 시가 새로 나올 때마다 추가하는 것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 안도현과 김은령의 시를 밖으로 끄집어 내놓는다.

안도현 시 <봄날은 간다>는 2004년에 상자한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작과비평사)에 실려 있는 시다.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으로 나온 시 가운데선 비교적 늦게 태어난 시다.

 안도현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안도현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 창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 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안도현 시 <봄날은 간다> 전문  

내가 굳이 이 시를 고른 이유는 이 시가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봄날을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 척의 커다란 범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뽕짝만큼, 혹은 능가하는 알싸한 느낌이 드는 시는 아닌 것 같다.

반면, 안도현 시인보다 조금 덜 알려진 김은령 시인이 쓴 <봄날은 간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면서 무언지 모를 알싸한 슬픔에 가슴을 저미게 한다.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모아드림
오봉순, 삼십 대, 나이 정확히 모름
경북 경산시 하양읍 동서3리, 이장님의 눈총과
배려 속에 마을회관에서 2년째 살고 있는 여자
남편, 가끔 보이기도 함
출생내력, 알지 못함

한글을 모를 뿐더러 숫자 개념이 없어
시간제로 일하는 단순노동의 임금을
종종 떼어먹히는 줄도 잘 모름
유일한 희망이자 낙은 그 날 번 일당으로
마을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맥주 한 병 사 마시는 일
아이 셋, 또래와 같이 학원도 보내야 하고 컴퓨터 사 달라고 졸라
당분간 맥주 한 잔 포기한다고 구멍가게 집 아줌마와 이장님께 선언함

대추꽃 피는 마을
마을회관 높은 방 벽과벽 사이 삼각의 꼭지점
거미, 집을 짓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막
기진맥진한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투명한 알 지금 부화 중이다
- 김은령 시 <봄날은 간다> 전문

1961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난 김은령은 1998년 계간 <불교문예>로 등단한 시인으로 2001년 봄 공동시집 <작은 새가 잠긴 늪>을 낸 바 있다. <봄날은 간다>는 2002년에 낸 그의 첫 개인 시집 <통조림>에 들어 있는 시다.

전체 3부로 이루어진 이 시집에서 시인은 개인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함께 인간을 에워싼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도 정직한 자세로 대응하고 있다. 시 <봄날은 간다> 역시 그런 시편들에 속한다.

이미지에 가린 삶의 막장에 처한 사람들의 삶

시 속 주인공 오봉순은 자신의 나이조차 정학하게 알지 못하는 정신지체 장애인이 아닌가 싶다. "남편, 가끔 보이기도 함"이라는 진술 속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남편까지도 똑같은 정신지체 장애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전에 가끔 나가본 적이 있는 별것 아닌 내 자원봉사의 경험에 의거, 판단하자면 그럴다는 것이다.

아무튼 혼자서 단순 노동을 하고 받는 임금으로 아이 셋을 부양하는 중이다. 그가 가진 취미라곤 마을 구멍가게에 앉아 맥주 한 병 홀짝거리는 게 전부다. 그 유일한 취미를 아이들 학원 보내고 컴퓨터 사주고 싶어서 포기하겠다고 하니 우리들의 오봉순씨는 얼마나 착한 사람인가. 이 정도 사리판단이나마 할 줄 아는 걸 보면 아마도 정신지체 3급 정도쯤 되지 않을까 싶다.

오봉순씨가 현재 처한 상황을 간략하게 서술해나가던 시인이 느닷없이 마을회관 벽에 지어진 거미집을 등장시킨다. 그런데 그 집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막"이다. 그런 위험한 집에서 "기진맥진한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투명한 알 지금 부화 중"이니 얼마나 걱정스러운가. 시인은 오봉순씨와 거미를 동일시한다. 사실 그 둘이 처한 위험이 같은 것이다. 시를 마저 읽고 나니 가슴이 찡하고 짠하다.

이쯤에서 나는 시의 제목에서 2% 부족한 것을 발견한다. 이 시의 제목은 <그래도 봄날은 간다>라고 했어야 옳았다. 오봉순씨의 삶이, 한 개인의 삶이 이렇게 위태롭고 위험천만하데도 봄날은 그저 무심하게, 태연하게 흘러갈 뿐이다.

이쯤에서 시를 읽은 느낌을 정리할 때가 됐다. 사실 우리가 '봄날은 간다'고 서운해 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은 저렇게 삶이 막장에 처한 불우한 사람들에 비추어보면 시시껄렁한 것이라는 것, 버려야 할 감정의 사치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 사는 걸 어찌 그렇게 모범답안처럼만 살 것이냐?"라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물론이다. 다만. 부지런히 피고 지는 세월 속에서 계절이 가진 아름다움을 즐기며 살되, 저렇게 생존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아주 잊지는 말자는 것뿐이다.

어쨌든 올해도 봄날이 저만치 흘러갔다. 덩달아 노래도 흘러간다. 이 땅의 시인들이여, 이제 그만 봄날에 열광하지 마라. 그리고 봄날이 간다고 탄식하지 말지어다. 그 대신 삶을 더욱 사랑하는 방법이 뭔지에 대해 좀 더 숙고하면 안 될까.


#봄날 #안도현 #김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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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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