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1시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 운동장, 1만여 명의 전국 농민들이 모였다. 농민들은 머리 위로 높이 손을 들어올렸다. 머리 위로 펼쳐진 빨간색 천에는 "쇠고기 협상 무효"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버림받은 한우 농가의 울분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진명호 한우협회 익산지부장은 "대한민국은 기업이 아니다"며 "이명박 대통령을 믿고 존경했는데 우리를 짓밟았다"며 거칠게 울분을 토해냈다.
남호경 전국한우협회장도 "협상은 아홉을 주고 하나를 챙겨야 주고받는 것인데 우리는 미국의 요구를 100%, 아니 200% 수용했다"며 "일을 저질러놓고 우는 농민에게 사탕 하나 물려주는 식의 대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 협회장은 "벼랑 끝에 와 있는 농민들을 또다시 속인다면 2단계·3단계 행동에 나설 것"이라며 미국 쇠고기 협상 무효화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날 단상 위로 올라온 전국한우협회 지부장들과 간부들은 농민들 앞에 큰절을 올리며 쇠고기 개방을 막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를 올렸다. 지도부의 집단 사죄 앞에서도 농민들의 한은 풀리지 않았다.
"위생규격도 못 맞추는 미국 잡소를 먹으라니..."
경남 통영에서 15마리의 소를 키우고 있는 임채연(71)씨는 한숨부터 길게 토해냈다. 임씨는 올해 96세 되신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임씨는 "6500원 하던 25㎏짜리 사료가 지금은 9500원으로 올랐는데 암송아지 가격은 30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떨어졌다"며 "팔려고 내놓아도 사가는 사람이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 소를 먹이고 있다"고 말했다. 임씨는 "아침 7시부터 올라와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뭔가 변하긴 하냐"며 "매번 속아왔다"고 읊조렸다.
울산에서 올라온 복채일(69)씨도 "사료값은 계속 오를 것"이라며 절망감을 드러냈다. 현재 40마리를 기르고 있는 복씨는 한 달에 사료값만 200만원 넘게 치르고 있다.
복씨는 "6개월짜리 황우가 21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떨어져도 안 사간다"며 "우리가 아무리 못 배우고 농사나 짓는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봐도 정부가 쇠고기 시장을 개방시킨 것은 농민을 다 죽이겠다는 뜻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말했다.
복씨의 곁에 있던 신문환(66)씨는 "정부는 말만 잘하지 정작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며 분노했다. 신씨는 "대통령이 미국산 쇠고기가 질 좋고 값도 싸다고 했다는데 먹고 죽으라는 뜻"이라며 "국민을 죽이는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천에서 올라온 신문희(54)씨는 "정부는 농민을 봉으로 안다"며 분노했다. 신씨는 "평생을 농촌에서 살았는데 매번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정부를 본 적이 없다"며 "그나마 지금까지는 소 키우는 것은 좀 남기라도 했는데 이제 이것마저 이명박이 망쳐버렸다"고 말했다.
"애 하나는 대학 졸업하고, 딸애 하나는 구미서 공장 다니고 있다. 애들이 벌어도 집의 빚이 줄지 않는다. 빚에 치여서 죽으려고 해도 억울해서 못 죽겠다."
젊은 축산인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에서 막노동했다"젊은 축산인들은 벌써부터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전남 담양의 젊은 축산인들의 모임인 청우회 농민들은 "한우를 왜 키웠는지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국인성 담양 청우회 총무는 5년 전 귀농해 한우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는 "연세가 드신 분들은 이제 아이들이 커서 괜찮지만 우리같이 젊은 사람들은 자식 걱정에 밤잠을 못 이룬다"고 말했다. 국씨의 아들과 딸은 이제 초등학교 4학년·2학년이다.
"하도 내가 사료값 때문에 고민하니까 아내가 너무 마음을 쓰면 우울증이 온다고 자기가 생활비를 어떻게든 줄여보겠다고 하더라. 집에 어머니도 계신데 TV 뉴스에서 쇠고기 이야기가 나오면 걱정하실까봐 TV를 꺼버린다."국씨는 "3년 전만 해도 귀농을 찬성했는데 지금은 도시에서 막노동이라도 해서 살라고 말린다"며 "빚까지 내서 귀농했는데,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옆에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심정"이라고 분노를 표했다.
청우회 회원인 이종욱씨도 "지금 굉장히 바쁜 시기이지만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오늘 올라왔는데 자꾸 '이미 끝나버린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씨는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에 가기 전에 미리 집행부에서 집회를 열거나 조직했어야 했다"며 "지금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 같다"고 말했다.
고영근 담양군지부 사무국장은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이 대등하지 않은 것은 뻔한 사실이고 언론은 한우의 우수성을 알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 사무국장은 "한우는 이력추적제를 실행해서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어떤 병을 앓았는지 다 알 수 있고, 축사 면적당 마리수도 엄격히 제한해서 키우고 있는데 미국 소는 이 기준을 좇아오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소한 외국에서 수입하는 소도 우리나라의 위생규격과 시스템에 맞아야 하는 것"이라며 "국민들에게 우리나라 위생규격도 못 맞춘 미국 잡소를 먹으라는 것은 국민들을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이번 협상을 강력하게 성토했다.
성난 농민들, 이명박 대통령 탄핵도 주장
3시간 가까이 진행된 집회 동안 농민들의 성토는 계속 이어졌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이 단상 위에 올라 "대만도 일본도 중국도 수입하지 않는 뼈있는 미국 쇠고기를 왜 우리나라만 수입하냐"며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 미 대통령에게 갖다바칠 선물 보따리 아니였냐"고 질타하자 집회 참가자들은 "옳소"를 연호했다.
일부 농민들은 단상 위로 올라가 이명박 대통령과 농림부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경남 하동의 김성철씨는 "광우병 쇠고기를 복어독에 비유한 농림부 장관이나 미국 쇠고기가 값도 싸고 질이 좋다고 선전한 대통령이나 갈아 치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충남지부의 이두언씨도 "즉각 국회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상정하라"며 "상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각 지역에서 국회의원들을 탄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겠다"고 강력히 경고하기도 했다.
이날 집회는 오후 3시 40분께 끝났다. 전국한우협회는 미국산 쇠고기 협상 무효화 선언문을 청와대에 전달하기 위해 그보다 10여분 일찍 차를 타고 떠났다. 한편, 정부청사 앞에는 농민들의 진입을 대비해 이 중으로 차벽이 세워졌고 53개 중대 6천여명의 경찰이 배치됐지만 별 다른 충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