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금), 새벽부터 강한 비가 뿌렸다. 빗소리에 눈을 떴다. 이른 아침 비를 맞으며 집을 나섰다. 아침 9시, 정선군 정선문화예술회관 앞. 비는 멈추지 않았고 동해로 가는 대절 버스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들이 길에 나선 할머니 곱게 화장까지 하셨대요비 때문에 나들이 행사가 취소된 것일까.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정선자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동면 지역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오느라고 조금 늦는다고 했다. 비 때문이리라. 조금 있으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안에는 나들이에 나선 어르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르신들로서는 모처럼의 나들이다.
잠시 후 정선지역자활센터 부설 노인복지센터 복지사들이 먹을 것들을 가득 싣고 왔다. 여기저기에서 후원을 받은 것들이다. 먹을 것들을 싣고서야 버스는 빗길을 떠났다. 노인복지센터 간사인 김미영 사회복지사가 출석을 체크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갓 입학한 초등학생처럼 손을 들어 대답을 했다.
"저녁 때 집에 도착해서 후회하지 마시고 오늘 즐겁게 노셔야 해요. 아시겠지요?"김미영씨의 말에 어르신들이 합창을 하듯 "예" 했다. 동면을 출발한 버스는 정선읍내를 거쳐 북평면과 북면에 사시는 어르신들을 태우고 임계면에 도착했다. 또 다른 버스는 신동읍과 고한읍, 사북읍, 임계면, 남면 등의 지역에 있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나들이길에 나섰다.
오전 10시, 두 대의 버스가 임계면에 모였다. 동해로 가려면 백두대간인 백봉령을 넘어야 하니 그쯤에서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화장실 한 번 다녀오는데도 시간은 제법 걸렸다. 걷기도 불편한 할머니와 나무지팡이를 짚고 나들이 길에 나선 할아버지. 그들을 모시고 가는 이들은 지역 노인복지센터 사람들. 이번 행사는 강원랜드복지재단의 후원으로 진행된단다.
이번 나들이 길에 나선 어르신들은 다들 독거 노인. 앞서 짝을 보낸 어르신들이 홀로 남은 생을 살아가고 있다. 아들 딸이 있는 어르신도 있고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남은 어르신도 있다. 버스 두 대에 나눠 탄 어르신들은 모두 62명. 한 할머니에게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물으니 '살아가는 일이 외로움과 싸워나가는 일과 같다'라고 표현한다.
아파도 참고 살아가는 어르신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해선 안돼그럴 것이다. 현대사의 굴곡을 고루 체험한 세대들이라 더욱 그렇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들은 새색시 때만 해도 시부모 봉양하는 걸 당연하게 알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어 요즘 며느리들은 그런 생각을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만다. 남편까지 먼저 떠나보내고 나니 곁에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단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지금처럼 잘 살게 한 일등공신들이다. 한때 국가는 어르신들에게 죽음까지 요구했다. 전쟁이 끝나고는 땀과 피를 요구했다. 때로는 콩을 심으라면 콩을 심었고, 돼지를 키우라면 돼지도 키웠다. 어르신들은 그렇게 국가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다. 그렇게 들어주다 보니 어느 새 초로의 나이. 그러나 국가는 어르신들을 나몰라라 한다.
국가는 어느 시기 부모없는 자식처럼 자신들이 자수성가를 한 듯 떠들어 댄다. 어르신들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린다. 뭘 바라고 살아온 생은 아니지만 어르신들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못내 섭섭하다.
"아파도 참고 살애요('살아요'의 사투리). 그게 상책이래요."나들이 길에 나선 할머니 할아버지들. 아프지 않은 어르신이 없다.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것도 힘겹지만 바다를 보고 동굴 구경도 한다니 집을 나섰다. 노인복지센터에서는 어르신들을 위해 흰색 티셔츠와 모자를 입혀 드렸다. 목에는 복지사의 전화번호가 적힌 이름표도 걸었다.
"길 잃으면 뒤에 적여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하세요. 아셨죠?"어르신들의 나들이는 유치원생들보다 손 가는 일이 더 많다. 버스 두 대 가는데 따라나선 직원들이 열 명도 넘는다. 하나 하나 챙겨야 할 것이 많은 까닭이다. 기자가 어르신들의 나들이 길에서 맡은 임무는 '찍사'이다. 사진 찍는 일도 드문 어르신들을 위해 멋진 사진을 남겨 주는 일이 기자가 할 일인 것이다.
백봉령 정상에 오르니 해가 뜨면서 동해바다가 어슴푸레 나타났다. 비가 계속 오면 어쩌나 싶었던 진행팀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선아라리 가사에도 나오는 백봉령은 정선 사람들이 걸어서 동해로 가던 옛길이기도 하다. 동해에서 소금을 사서 지게 짐으로 정선까지 왔단다.
유치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어르신들아직은 오전 시간.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눈 인사만 했으니 서먹서먹하기만 했다. 운전기사가 분위기를 살려보기 위해 관광버스용 음악인 트로트 메들리를 크게 틀었으나 분위기는 살아나지 않았다.
동해에 도착한 버스는 곧장 동해시 천곡동굴로 갔다. 30여 분이면 둘러보는 천곡동굴. 동굴로 들어가기 위해선 노란색 안전모자를 써야했다. 줄을 맞추어 서 있는 어르신들. 곁을 지나가는 유치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하는 동굴이라 어르신들이 힘들어 했다. 농사일로 관절이 아픈 것 정도는 기본인 어르신들이다. 더불어 어두운 곳을 싫어하는 것은 어르신들의 공통사항. 어둠은 곧 죽음이라는 의식이 강한 탓이다. 두 사람씩 손을 꼭 잡고 동굴로 들어갔다. 한 할머니가 무섭다며 밖으로 나가겠단다. 복지사가 할머니 손을 잡으며 안내를 했다.
"아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괜히 따라왔나봐. 미안해서 어째…."할머니는 괜히 따라와서 젊은 사람들 고생만 시킨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무슨 말씀을요, 어르신들은 충분히 즐길 권리가 있는 분들입니다."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우리의 미래다. 화살같이 빠르기만 한 세월. 몇 번의 잠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어른을 공경하고 잘 모셔야 하는 이유가 크지만 우리는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동굴 구경을 끝낸 어르신들은 삼척으로 이동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갔다. 새천년 해안도로 인근에 있는 횟집에 도착한 어르신들은 회와 매운탕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반주로 소주를 곁들이자 나들이 분위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오늘 나들이로 10년은 젊어 진 것 같아요점심 식사를 끝내고 버스에 올랐을 무렵엔 버스 분위기가 식사를 하기 전보다 달아 올라 있었다. 흥에 겨웠던지 춤을 추는 할머니도 생겨났다. 조금은 멋쩍고 겸연쩍었던 순간이 언제 있었느냐 싶다. 자리에 앉아 춤을 추고 있는 할머니께 물었다.
"좋으세요?""그럼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간밤 소풍 떠나는 아이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할머니도 있었다. 버스는 유채꽃 축제를 벌이고 있는 맹방해수욕장으로 갔다. 노란물결이 일렁이는 유채꽃을 본 어르신들은 급기야 환성을 터트렸다. 유채꽃을 처음 본다는 할머니는 꽃향기를 맡기도 하고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어서 찍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임무를 완성해야 하는 기자는 어르신들이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 사진을 찍었다. 할아버지들은 대체로 반듯하게 서서 사진을 찍지만, 꽃밭을 만난 할머니들은 처녀시절로 되돌아 간듯 나름의 멋진 자세를 취하곤 찍사를 불렀다. 독사진을 찍고난 후엔 친해진 사람끼리, 혹은 할아버지가 낀 단체사진을 찍었다.
"10년은 젊어진 것 같아요. 이런 일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어요."조용히 유채꽃을 바라보고 있던 할아버지께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니 10년은 젊어진 기분이 든다고 했다. 비록 백발에 틀니를 했지만 할머니라는 소리를 죽기 보다 듣기 싫다는 할머니도 많다. 관광 간다니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도 있었다. 마음은 청춘이지만 어느 덧 백발이 된 어르신들. 세월이 무상하고 덧없다.
탁 트인 바다를 본 어르신들은 일생동안 담아온 한을 토해내듯 큰 숨을 몰아쉬었다. 나무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에게 바다를 본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우리 지께는 산만 있어 답답한데 여기 오니 속이 확 풀리네요."문득 일흔 여섯이 되도록 바다 구경 한 번 해보지 못한 어머니가 생각나 가슴 한 편이 아릿했다. 그 흔한 관광여행 한 번 하지 못하고 일흔 여섯이 된 어머니. 언젠가 바다 구경을 가자니 "바다가 별 거 있겠냐"하며 손사래를 치던 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온 것이 후회도 되고 미안하기도 했다.
우리의 미래도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노인복지센터 직원들이 종이 박스를 하나씩 풀었다. 그것은 보물 항아리와 같아서 없는 것이 없었다. 바나나와 방울토마토가 나오는가 싶으면 딸기가 나왔고, 떡이 나오는가 싶으면 금방 과자와 음료수가 나왔다.
짧은 여행이 아쉬운 듯 어르신들은 버스 통로에 나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른바 관광버스용 춤. 춤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손을 흔드는 형식이지만 어르신들은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직원들은 혹여 생길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통로 군데 군데 서서 어르신들을 보호했다.
버스는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어르신들 몇을 내려놓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어르신들의 손엔 과일을 비롯해 떡과 과자, 음료수, 수건 등이 들어 있는 선물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하루 나들이로 일생의 고달픔이 풀릴 수야 없겠지만 어르신들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잔뜩 걸려 있다.
오후 5시가 되어 버스는 처음 출발한 곳으로 돌아왔다. 하루 낮의 나들이 길. 버스가 도착해도 어르신들을 마중 나온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어르신들의 뒷모습에 얹힌 '더깨'가 세월이 만든 짐처럼 무거워 보였다. 더불어 우리의 쓸쓸하고 외로운 미래 또한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