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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사대부집 솟을대문이 굳게 잠겨있다. 강원도 강릉 허난설헌생가.
▲ 솟을대문. 사대부집 솟을대문이 굳게 잠겨있다. 강원도 강릉 허난설헌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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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이 돌아온 한성은 울음바다였다. 죽은 줄만 알았던 부모와 자식이 만나고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았던 형제가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끌려갈 때의 절망과 돌아올 때의 고단함도 봄볕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감격의 해후였다. 어느 한 두 집의 경사가 아니라 도성 전체가 이산가족 상봉장이 되엇다.

돌아온 남자 포로들이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여자들은 달랐다. 환향녀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았고 딸 가진 부모는 죄인이었다.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자는 시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환향녀는 죄인이 되어 친정에 틀어박혀 문밖 출입을 삼갔고 부모는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 민심이 흉흉해졌다.

급기야 환향녀 문제는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가 되었다. 인조의 반정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대소신료들은 딸 가진 사람과 며느리를 맞이한 사람으로 갈라졌다. 이들은 극렬하게 대립했다.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환향녀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좌의정 최명길이 인정(人情)은 인륜의 상위개념이라는 논지를 폈다.

사랑채.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 조선 왕실은 궁궐 안에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지어놓고 사대부들의 생활을 알기 위하여 사대부들과 똑같은 생활을 몸소 체험했다. 연경당은 순조 28년 90칸 집으로 지었다.
▲ 사랑채.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 조선 왕실은 궁궐 안에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지어놓고 사대부들의 생활을 알기 위하여 사대부들과 똑같은 생활을 몸소 체험했다. 연경당은 순조 28년 90칸 집으로 지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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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돌아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게 해야 합니다"

"임진왜란 때 어떤 문관이 새 장가를 들었다가 아내가 일본에서 쇄환되자 선조께서 후취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였으며 그 처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정실부인으로 올렸습니다. 이외에도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아 명문거족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예(禮)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때에 따라 마땅함을 달리 하는 것으로서 한 가지 예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렵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인조실록>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는 것이다. 사대부에게 있어서 절의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덕목인데 어디에다 정을 갖다 붙이냐는 것이다. 중신들의 의견을 모아 사헌부에서 상소했다.

사대부집 담장.  사대부집 담장은 높기만 하다. 허난설헌 생가
▲ 사대부집 담장. 사대부집 담장은 높기만 하다. 허난설헌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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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습니다.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관계가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家風)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사대부들의 지상 목표는 충과 효였다. 훼절은 충효의 가치관에 반한다는 것이다. 이토록 목소리를 높이는 사대부들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자신들의 행위는 옳다는 것이다. 사간원에서 지원 사격에 나섰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을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합니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 하더라도 본받을 만한 규례는 아닙니다.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습니까?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를 잇는다면 이런 수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입니다. 통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연려실기술>

사잇문. 평소 여자들이 드나들던 사잇문이지만 심양에서 돌아온 며느리들에게는 열리지 않은 문이었다. 연경당 우신문.
▲ 사잇문. 평소 여자들이 드나들던 사잇문이지만 심양에서 돌아온 며느리들에게는 열리지 않은 문이었다. 연경당 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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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한 것이다. 환향녀 문제를 인륜 이전에 인간의 원초적인 정으로 접근하려던 최명길의 복안은 설 땅을 잃었다. 궁지에 몰린 최명길을 인조가 조용히 불렀다.

"쇄환녀 문제는 부부 간의 사생활이니 국가에서 개입해서는 아니 될 것 같다. 물 흐르듯이 놔두면 시간이 해결할 것이다. 경이 여기 있으면 소란스러울 것 같으니 청국에 다녀오도록 하라."
"청나라라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 청나라가 이번에 포로를 돌려보내주었으니 고맙다는 내 뜻을 황제에게 전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경이 청국을 방문하면 저들은 군사징발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의 사정을 잘 설명하여 군대가 나가는 일은 없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삼전도 항복 이후, 인조의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것이 강화조약 넷째 조항이었다.

'청이 명나라를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총 11개 조항 중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조약이었다. 240여 년 간 아버지의 나라로 모셨던 명나라를 어떻게 공격한단 말인가? 명나라는 천자가 있는 아버지의 나라가 아닌가. 어떻게 아들이 칼을 들고 아버지 나라를 친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현실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청나라에 밀리는 명나라가 기사회생하기를 고대했지만 명나라에서 들려온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망국의 길로 접어든 명나라 소식은 절망이었다

며칠 전 비밀리에 명나라에 파견했던 동지사 김육과 서장관 이만영이 돌아왔다. 그들은 청나라 관리들의 눈을 피해 우회로를 택해 북경을 다녀오느라 시간도 많이 걸렸고 죽을 고비도 넘겼다.

"천조(天朝)에서는 우리나라의 일을 어떻게 여기던가?"
"천조에서 우리나라의 사정을 환히 알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만 리 밖을 밝게 보고 있으니 천은(天恩)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진 도독(都督)은 어찌하여 가도를 구하지 않는가?"
"진 도독의 군사는 1만여 명에 지나지 않으니 구하지 못할 형세입니다."

"천조의 치란(治亂)은 어떠한가?"
"조사(朝士)의 탐욕이 날로 심해지고 환관의 교만방자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또한 각처에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육의 보고는 인조를 절망케 했다. 한 가닥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에 망국의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최명길을 더 가까이 부른 인조는 나직이 말했다.

"저들이 경을 대우하는 것은 필시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니 경은 잘 해야 한다. 또 세자와 대군은 이별한 지 여러 달이 되었으므로 부자의 정이 간절할 뿐더러 대상(大祥)이 다가왔으니 내보내 달라는 뜻을 간절히 말해야 하겠다."
"소신의 청(請)보다도 전하의 자문이 옳을 듯 하옵니다."

"자문을 따로 하나 만들어 줄 터이니 세자와 대군을 꼭 데리고 나오도록 하라."
"지금이 그 시기입니다마는 저들은 반드시 빈궁도 한꺼번에 내보내지는 않을 듯합니다."

"이번 자문에는 빈궁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원군 철회와 세자 환국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최명길이 심양으로 떠났다.


#환향녀#사대부#심양#최명길#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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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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