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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를 부르는 장르소설이 있다. 그들 중에는 ‘공포’의 이유를 밝히는 것이 있다. 예컨대 비밀리에 진행한 방사능 실험이 잘못돼 괴물이 탄생했다거나 혹은 어렸을 때 학대를 당해서 연쇄살인범이 됐다거나 하는 식이다. 반면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포를 생산하는 책들이 있다. 이유도 없고 사연도 없다. ‘무조건’이다. 최근에 출판사 비채에서 소개한 <폐허>도 그런 작품이다.

 

멕시코로 놀러간 두 쌍의 미국인 커플은 현지인들과 함께 모험을 하게 된다. 모험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다. 현지인의 동생이 ‘폐허'를 찾아갔는데 함께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무료함을 달랠 겸 젊은이들은 별생각 없이 정글로 떠난다. 폐허를 찾아가던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 황폐한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그곳은 괴상한 곳이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그곳은 누가 봐도 불길했다.

 

그럼에도 무료한 여행을 하던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폐허가 있는 언덕 아래에 이르게 된다. 그들이 그곳에 오르려고 하던 때 마야인들이 찾아와 위협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은 여행객들을 막는 것 같기도 하고 올라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때 멈췄다면 어떠했을까? 그들의 생사는 그곳에서 갈렸다.

 

언덕에 오르자, 버려진 텐트가 있다. 그리고 뼈가 있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언덕을 내려가려 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가? 마야인들이 사방에서 활과 총을 겨눈다.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들은 그곳에서 불안에 떨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한다. 그러던 중에 일이 생긴다. 덩굴의 공격이다. 언덕의 이곳저곳에서 덩굴이 그들을 노리고 있다.

 

덩굴이 무엇인가? 식물이다. 과연 그것이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가? 아나콘다나 고질라 같은 것도 아닌, 식물이 공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폐허>의 그들도 그랬다. 그러나 덩굴은 공격하고 있었다. 멀쩡할 때는 공격하지 않는다. 상처가 생기면 그 틈으로 들어온다. 불의의 사고로 신체를 잘라낸다면, 덩굴이 와서 그것의 살점을 발라먹는다.

 

이유가 무엇인가? 모른다. 모르기에 더 두렵다. 언덕을 도망가려고 해도 마야인들 때문에 갈 수가 없다. 식량과 물이 떨어지는 때에 여행객들은 두려움에 치를 떤다. 방법이 없을까? 어디선가 핸드폰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그것으로 구조를 요청하려고 하지만 덩굴은 ‘지능’적이다.

 

그것은 호락호락하게 먹잇감을 놔주지 않는다. 소리까지 만들어내는 덩굴, 몸속에 들어가 꿈틀거리는 덩굴, 잠시라도 틈을 보인다면 입과 코를 막아 질식사시킨 후에 살점을 깨끗하게 먹어버리는 덩굴은 오히려 사냥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그들을 요리한다.

 

이 과정을 스콧 스미스는 생생하게 그려냈다. 영화처럼 눈에 보이게 그렸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두려움에 떠는 그들의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공포에 정신을 놓을 정도로 두려워하는 그들의 심리묘사를 적나라하게 그렸다.

 

그래서일까. 그 뚜렷하고도 ‘내 것’처럼 느껴지는 심리묘사 덕분에 이 소설은 웬만한 장르소설로 내성을 지녔다 할지라도 적응하기 힘든 공포를 체험하게 해준다.

 

폐쇄된 곳에서 이유도 모른 채 공격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폐허>, 오랜만에 호러소설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 더운 날이 무색할 만큼 서늘하니 폐허를 올해 여행지로 찜해두면 두고두고 좋다.


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비채(2008)


#호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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