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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것은 시공간적 제약의 한계를 넘는 지식과 경험의 확장이다.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며, 경험하고 싶다고 모든 것을 경험해 볼 수는 없다. 책은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때로는 책이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아도 어떨 때는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만을 제공한다는 기분을 들게 할 때도 많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지식의 실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생을 만날 때마다 사각형의 교실 안에서 교사가 책을 통해서 가르칠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생각한다. 교사가 보는 것은 학교에서 교과서라는 창을 통해 보는 세상이다. 그런데 교과서는 모든 이에게 무색무취한 지식을 가르치는 탓에 가끔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할 지식을 써놓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러한 한계를 느낄 때마다 교사는 책을 찾는다. 교과서에 있는 원론의 이야기를 넘어 이면과 진실을 담고 있는 생생한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생각만큼 조건을 구비한 책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폐쇄적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분야의 책은 생생한 정보와는 더욱 거리가 먼 내용들이 양산되기 쉽다. 폐쇄적 전문성은 바로 그 폐쇄성에서 오는 전문성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 분야 종사자들은 이것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세 신부들이 라틴어 성경의 자국어 번역을 막았던 이유나 천문의 이치를 알고 있는 무당들이 무지한 백성들에게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도 다 같은 맥락일 것이다.

비록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금태섭 당시 현직 검사가 2006년 9월 <한겨레>에 쓴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란 연재물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딱 한 번의 기고가 되었던 이 글의 핵심은 피의자가 되었을 때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과 '모든 것을 최대한 동원하여 유능한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현직 검사의 글을 통해 나온 진실은 마치 천기누설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신문에서 책으로 ... 금태섭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지난 2006년 9월 <한겨레>에 실렸던 금태섭 검사의 '수사받는 법'.
지난 2006년 9월 <한겨레>에 실렸던 금태섭 검사의 '수사받는 법'. ⓒ 한겨레PDF
검찰은 조직의 힘을 무기로 이 글의 연재를 막았지만, 사실 글의 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진술거부권'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고등학교 '법과 사회'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극히 상식적인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란 연재물이 관심을 끌게 된 것은 현직 검사를 통해서 무미건조한 교과서나 법학개론을 넘어서는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재 중단으로 아쉬움을 느껴야 했던 독자들은 이번에 그것을 달래줄 기회를 얻게 된 것 같다. 한겨레 기고로 인하여 검찰을 떠나야 했던 금태섭 변호사가 법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법의 여신인 디케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지은 <디케의 눈>(궁리출판사, 2008.4)이란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인간적 한계를 갖고 수사에 임하는 검사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TV카메라 앞에서 실체적 진실을 완벽히 밝혀낸 양, 의기양양하게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검사의 모습과는 다른 검사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이 마무리했던 수사 결과에 대하여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오판의 가능성이 생각보다 높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는 극히 상식적임에도 법 전문가의 이야기를 통해 나온다는 점에서 무척 신선하였다.

학교에서 교양 법학 시간에 배웠을 여러 내용의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는 것도 이 책이 가지는 또 다른 묘미이다. 미국 영화에서 피의자를 체포할 때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며 온갖 피의자 권리를 알려주는 낯설지 않은 모습의 배경도 이 책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미란다 원칙'이라고 하는 이러한 경찰의 고지 의무는 미란다라고 하는 치졸한 성폭행범이 무죄 선고를 받으면서 시작된 원칙이라고 한다. 책은 이 사건의 시작부터 판결까지를 흥미진진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한겨레> 기고와 사회적 파장으로 진보적인 입장에서 글을 썼을 것이란 선입견과 달리, 법조인답게 법적인 객관성을 유지하는 글의 위치가 읽는 이로 하여금 더 많은 신뢰를 주고 있다. 저자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법을 하다보면 아무리 소수자나 인기 없는 입장이라도 나름의 근거가 있음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책이 어떤 위치에서 쓰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법조인의 은어에 주눅 든 사람들이여, 읽어라

 금태섭 변호사가 펴낸 <디케의 눈> 겉그림.
금태섭 변호사가 펴낸 <디케의 눈> 겉그림. ⓒ 궁리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의 개인적 경험을 제외하고는 소재가 미국의 법적 사례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날 것의 이야기를 바라는 독자들에게는 큰 아쉬움이다.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저자답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문제와 관련 있는 많은 사건들을 책 속에 녹아내었다면 한결 더 많은 이해와 공감을 불러 올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 현실의 이야기는 금태섭 변호사가 법조현장에서 만나야 할 이런 저런 연줄로 얽혀 있을 사람들의 이야기라 언급하기가 더욱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든다.

우리는 살면서 검찰의 입에서 나오는 수많은 논리를 들으면서 살아야 한다. 멀리는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불기소 처분을 하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강변하던 이야기에서, 얼마 전 '그럼 이건희 회장을 구속하는 것이 맞나'라고 큰소리를 치던 삼성 특검까지 우리가 좋든 싫든 우리의 감정과 맞지 않게 강요되는 여러 논리를 계속해서 설파될 것이다.

이제 의외의 판결 결과에 그냥 놀라고 승복하는 TV 프로그램 <솔로몬의 선택>식 법 인식보다는 진실을 향해 겸손해 할 줄 아는 법에 대한 성찰적 자세가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법 관련 서적이라고는 이혼이나 부동산 매매와 같은 생활법률 책 아니면 육법전서라고 하는 고시 책이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디케의 눈>은 대형서점 인문사회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딱딱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법 관련 책으로는 놀랄만한 판매량이다. 그만큼 이런 책에 대한 독자들의 갈망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큰소리를 치는 전문 법조인의 논리 속에서 평범한 상식을 가진 사람의 논리도 정당한 발언권을 행사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알듯 모를 듯한 '리갈 마인드'라는 법조인들의 은어에 주눅 들어 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사회적 효과가 큰 천기누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전대원 기자는 고등학교에서 '법과 사회'를 가르치는 현직 교사입니다. 학생들에게 <디케의 눈>과 함께 경북대학교 김두식 교수가 쓴 <헌법의 풍경>이란 책을 함께 권하고 있습니다. 현직 검사의 경험을 가진 저자의 책이라는 점에서 두 책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선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궁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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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섭#디케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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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고등어 사전(메디치미디어)>, <나의 권리를 말한다(뜨인돌)>, <세상을 보는 경제(인포더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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