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산을 오르는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적어도 몇 번씩 자문자답을 하는 명제일 것이다. 만일 누가 나에게 당신은 왜 산에 가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곤란하여 망설일 것이다. 그것은 언제, 누구와, 어떤 산을 무슨 목적으로 가느냐는 등 여러 가지 정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대답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 화두에 대한 유명한 선문답 사례는 어느 중년 부인의 질문과 조지 말로리의 답변에서 찾을 수 있다. 1924년 미국 뉴욕에서 영국의 3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대표 대원격인 말로리의 초청강연이 있었다. 강연 도중 어떤 중년부인이 일어나서 화가 잔뜩 난 음성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밖에 없는 산을 왜 가야만 하는 겁니까?"라고 거친 항의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걱정으로 가득 찬 어머니 같은 질문이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로 대답하지 않았다면 그 대화는 끝없이 길어졌을 것이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은 많은 부를 축적했으며 그 넘치는 부를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에너지로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알프스를 대상으로 한 등산을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여 초창기 등산 역사의 주역이 된다. 알프스의 미답 봉들이 없어지자 영국은 1951년 11번째 실패를 딛고 세계의 정상인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여 전 세계에 그 위용을 떨친다. 그 후 에베레스트 산군은 서구 열강들의 국력을 시험하는 무대가 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순수 등산의 의미를 부각시킨 경우도 있다. 1954년 히말라야 8000미터 가운데 하나인 마칼루(Makalru, 8481m)를 초등한 프랑스 등반대장이었던 장 프랑코(Jean Franco, 1914~?)의 "등산은 스포츠요 정열이며 탈출이고 때로는 하나의 종교이다"라고 정의 했다. 등산의 내면적인 성격을 잘 묘사한 말로 여겨지며 지금까지 내가 신봉하고 있는 나의 등산관이다.
오늘날에는 등산이 우리들의 생활 일부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므로 등산을 영국식으로 알프스 산군과 같이 표고 3000~4000미터의 고소의 산을 오르는 행위로 해석할 수 없다. 능선 따라 정상에 이르는 등정주의 만을 고려한다면, 2000미터가 넘는 고지가 없는 우리의 입장에서 등산이 인간능력의 한계를 확인하거나 극복하는 대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등산을 가벼운 기분전환이나 유흥행위로 여길 수는 더욱 없다.
나는 1969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에 대학을 들어갔지만 나의 이상과 현실을 타협하지 못해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했던 것 같다. 이때 나에게 다가온 산은 비전을 제시해 주는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속세로 내려오면 다시 만나게 되는 현실의 문제들은 다시 나를 구속했다.
반항의 수단으로 많은 술을 마셨고 주말이 되면 다시 이상향 같은 산을 찾은 시절이 대학 산악회원 시절이다. 말없이 나를 반기는 산이 좋아 산을 다녔고 악우들의 이해타산이 배제된 무조건 정이 그렇게 좋았다.
나는 6년간 다닌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 후, 3년 동안 고향에서 직장생활을 한 후 지금까지 타향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70학번 13기 정부흥'이 나의 자리이고 그때 맺은 형들과 아우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나의 악우들이다. 그들과 같이 있다 보면 타향살이 30년 공백을 어느 틈에 뛰어넘는지 모른다. 30여 년 전의 얘기를 어제 일 같이 말한다. 산을 중심으로 한 마음의 고향이 아니라면 어찌 그 같은 일이 가능할까?
그때가 엊그제 같건만 산악회 창립 50주년 원고를 쓰고 있다. 내가 재학생시절로부터 4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주변의 산에 대한 정서 역시 많이 변했다. 지금까지 전남대학교산악회와 광주와 서울의 전남대학교 OB산악회원들인 나의 선·후배 악우들이 초모랑마(에베레스트) 등정을 비롯한 한국의 등산역사를 장식할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
전남대학교 산악회는 대학을 모태로 성장해온 모임이다. 마땅히 젊은 지성인들의 모임으로써 추구해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수시 점검하여 모든 등산인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산은 모든 것을 수용한다. 나무의 종류를 봐도 그렇고, 산에 사는 동물들을 봐도 그렇다. 하물며 인종을 차별하고 지위의 높고 낮음, 그리고 부의 있고 없음을 따지던가? 그러나 산은 냉엄하다. 준비되지 않는 자나 자기를 낮출 줄 모르는 자들은 거절당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산은 우리의 도장이고 시험장이다.
나무의 새순은 가지의 끝 성장점에서 나오고 용수철의 고정변화는 탄성한계의 임계점을 넘어야 한다. 진정한 자아를 만나고 나를 확장하고 싶다면 나와 내가 아닌 경계선에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점을 우리는 알피니즘 변천과정의 역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고 험난한 고산 등산을 통해 실제로 습득하게 된다. 더 높은 산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
대학산악부라면 머메리즘의 등로주의에 입각하고 'by fair means'에 부합한 정신과 기술을 함양하여 등반기술 또한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아야 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듯이 히말라야나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가시적인 면에 너무 치우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등산은 경쟁이 아니라는 말들을 수 없이 들어왔지만 산의 화려한 이력과 경력에 의해 계급이 결정되는 사례 또한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나는 30여 년 간 대전에 살면서 나와 집사람 2명이 총원인 전남대학교 OB산악회 대전지부(?)를 만들어 우리나라 산 중 1000미터 가 넘는 산이란 산은 거의 섭렵했다. 실제로 지도에 다녀온 산 중 1000고지가 넘는 산만을 투명 펜으로 표시했더니 거의 150여 개 산이 표시되었다.
여러 번 다녀온 산을 감안하면 적어도 300회 이상 등산을 했다고 생각된다. 이때 우리는 산에 가는 목적이 특별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건강, 스트레스해소, 정신적인 자유 등 그야말로 생활의 일부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히말라야를 그리게 되었고, 2006년 후배들의 초모랑마 등반을 많이도 기다렸지만 네팔의 국내사정 때문에 무산되었다. 다음 기회를 기다렸으나 나는 2007년 1월 1일 뇌졸증으로 입원하였다. 지금은 거의 회복되어 내년에는 못 이룬 꿈을 실현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재활치료 때에도 '산에 가고 싶다', '가야한다'는 의지는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국내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대상산을 선정할 때는 언제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이 일었고 산은 언제나 내가 준비해간 그릇에 맞춰 보답을 담아 줬다. 큰 그릇 일 때는 크게 작은 그릇 일 때는 적게 채워줬다. 나와 집사람은 산을 통해 자신들과 대화에 친숙해졌으며 자아를 찾아가는 훈련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낮은 산을 높게오른다"는 김영도님의 말씀이 새롭다.
50년 대 연륜을 쌓아온 전남대학교산악회이니만큼 외적 성장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내적 성숙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되어 평소 산에 대한 나의 견해를 두서없이 피력해 봤다.
<가르왈 히말라야>를 쓴 임현담은 자연(산)을 통하지 않고는 자기를 만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동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남대학교 산악회 창립 50주년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