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천을 따라 걷는다. 나는 지금 개태사로 가는 길이다. 황산에서 후백제의 왕 견훤의 아들인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왕건은 천호산 아래에다 절을 지었다.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도록 해준 부처님께 보답하고, 산신령님이 도와주신 것을 갚으려는 것이었다.
절 이름을 '개태사'라 했다. '개태(開泰)'란 '태평한 시대를 연다'라는 뜻이다. 절 이름이 다분히 정치적 선언이다. 정치적 보복은 없다. 그러니 후백제의 유민들이여, 안심하라. 내가 이제부터 태평성대를 열지니.
연산천변에 죽 늘어선 버드나무들은 축 늘어진 가지를 하늘거리고 있다. 사계 중에서 가장 태평한 시기는 아마도 봄일 것이다. 봄 중에서도 아직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하기 전인 요즘 같은 때가 아닐는지.
사주문에서 절에 이르는 길은 아주 짧다. 너무 짧은 나머지 미처 평화를 맛보기도 전에 끝나버린다. 그래도 내겐 연산천변 버드나무가 안겨준 평화가 아직 남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길 양옆으로는 초파일 연등이 죽 걸려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다.
경내로 들어서자, 몇 채 되지 않은 전각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부 근래에 지은 것들이다. 전성기엔 천 여명의 승려가 상주하였고, 한때는 8만 9암자가 이 절에 소속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다.
그렇게 화려했던 절은 어느 한 시기에 돌연 폐허가 돼 버렸다. 거대한 석불은 도랑 속에 묻히고 거대한 밥솥인 철확은 홍수에 떠내려갔으며, 절의 자취조차 없어진 것이다. 폐허뿐인 절터에 새로 건물을 지은 것은 1934년 김광영 스님이란 분이었다. 처음에 절 이름도 '도광사'라 불렀다가 다시 '개태사'로 고쳐 불렀다. 어쩌면 처음엔 개태사의 내력을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인지 모른다.
가장 먼저 달려나와 나그네를 맞는 것은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5층석탑이다. 이 탑에는 기단이 없다. 5층의 몸돌만 차례로 쌓아 둔 것이다. 몸돌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 넣었을 뿐인 매우 소박한 탑이다. 그런데 왜 옛 터에서 이 탑을 옮기면서 굳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 수 없다. 절 마당이 좁긴 하지만 주불전인 용화대보궁 정면에 세워두는 게 맞지 않을까.
석재가 가진 둔중함을 떨쳐버리지 못한 삼존불
주불전인 용화대보궁으로 간다. 안에는 거대한 삼존불이 서 있다. 이 석불들은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백제 유민들에게 정복자로서 자신의 위엄을 한껏 과시하고 싶었던 왕건의 의식이 투영된 것일까. 석불들이 서 있는 모습이 아주 위압적이다. 자비하신 부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갑옷과 투구를 갖춘 무사의 느낌이 들게 한다. 석재가 가진 둔중함을 떨쳐버릴 만큼 세련된 솜씨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왼쪽 협시보살의 조각이 조금 나은 편이다. 불전 안이 매우 어두운 것도 이 삼존불이 풍기는 인상을 칙칙하게 만드는 데 한몫 거드는 것 같다.
수인의 모양으로 보아 이 세 분 돌부처는 아미타삼존상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왜 전각 이름을 미륵부처가 머무는 용화대보궁(龍華大寶宮)이라 했을까.
용화대보궁 우측에는 정법궁과 우주각이라는 전각, 그리고 커다란 솥을 보호하고자 지은 보호각이 나란히 서 있다.
정법궁 전면 기둥에는 주련 형식을 빌려 한자로 '남북통일세게평화기원대도량'이라는 글을 써놓았다. 개태사가 호국의 성격을 지닌 사찰임을 강조하려는 뜻인가 보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셨으며 우측에는 단군 영정을 걸어 놓았다. 그래서 이 전각을 단군전이라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정법궁 옆에는 우주각이란 전각이 있다. 정면에는 '삼일로상정천(三一老上正天)'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안에는 층층이 쌓아 올린 방석 위에 동자부처가 앉아 있다. 아주 작고 앙증맞기까지한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번진다.
'꼬마 부처'일망정 상부에는 닫집을 두었으니 겹겹이 쌓인 방석과 함께 아주 호강하는 부처라 할 만하다.
"살았을 때 연산의 가마솥을 보았느냐?"
우주각 우측에는 사모지붕을 한 우주정이란 전각이 있다. 1981년에 철확을 보호하려고 지은 건물이다. 정면에는 '우주정(宇宙井)'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우주의 샘이라, 좀 거창하긴 하지만 이만큼 큰 솥에다 붙임직한 이름으로선 괜찮은 편이다.
건물 안엔 커다란 쇠솥이 놓여 있다. 옛날 개태사 주방에서 사용했다고 전하는 철로 만든 대형 솥이다. 전성기 때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에 이를 정도로 큰 이 솥의 존재는 개태사에 한때 수백 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여기게 한다.
조선시대 절이 없어지면서 벌판에 방치된 채 버러져 있다가 여러 곳으로 옮겼다닌 기구한 이력을 지닌 솥이다. 일제 말기에는 이 솥을 전쟁에 쓸 무기를 만드는 데 쓰려던 일본 사람들이 솥을 깨트리려다가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논산사람이 죽어 시왕산 염라대왕을 만나면 "연산의 가마솥과 은진의 미륵과 강경 미내다리를 보았느냐?"라고 했다는 가마솥. 지옥에까지 명성이 자자한 이 솥은 이제 소원을 비는 '성황당'이 되어 있다. 솥 안에 던져진 동전들이 그것이다.
참을 수 없는 집권 세력의 쪼잔함
개태사를 나와 옛날 개태사 자리로 향한다. 북쪽으로 4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예전엔 건물 자리와 주춧돌·석조·불상의 대좌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개태사지는 텅 비어 있다. 짝 잃은 당간지주 한 짝만 외로이 옛 절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개태사터 일대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군이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략할 때 통과했던 진격로이다. 백제의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근처 황산벌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그 후로도 이곳은 여전히 군사·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에서 현재의 위치로 개태사가 옮겨간 것은 세종 10년(1428)의 일이다. 왜, 무엇 때문에 옮겨간 것일까. 그것도 아주 먼 곳이라면 모를까, 바로 코 앞이 아닌가. 주위에 사찰을 지키려고 쌓은 약 6㎞에 달하는 토성이 있었다는데 혹 밀려오는 적을 관찰하기 불편해서 옮긴 건 아닐까.
조금 떨어진 언덕으로 올라가서 개태사를 바라본다. 개태사 뒤로는 높낮이에 변화가 없는 천호산이 달려가고 있다. 저 산의 이름은 원래 '황산'이었다. 그러나 왕건은 산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라는 천호산(天護山)이라고 바꾸어 버렸다.
뭣이든지 제 입맛에 맞게 바꾸려는 경향이 권력의 속성인가.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쟁취한 세력은 똑같은가 보다. '무소불위'란 말이 공연히 생긴 게 아니다. 산 이름 같이 사소한 것까지 모조리 바꿔야만 비로소 권력을 잡은 느낌이 드는 걸까. 왜 권력자들은 알지 못하는걸까.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지구의 자전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어지럽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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