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은 밤새 감격의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신채호와 조성환과 박찬익이 신규식의 집에 와 그의 손을 부여잡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항주에 가 요양하려고 마음먹었다. 아내 조정완이 방에 들어와 남편의 들썩이는 어깨를 가라 앉혔다. 민필호와 신명호도 아래층에 숙연히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신규식은 요양차 항주로 향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니 일단 자기 할 일은 끝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열흘 후인 4월 23일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종교계 대표들이 국내에서 13도 대표 23인의 이름으로 선포문을 발표하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 것이었다. 이른바 한성정부라는 것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민제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정부가 국내에 있는 것이 해외에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정통성도 없는 단체가 함부로 정부를 선언하는 것은 분열주의거나 소영웅 심리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고 민제호는 생각했다. 그는 한성정부 수립을 주도했다는 이규갑이나 홍진 같은 사람이 누군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예관 선생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냥 무시하면 되는 일입니다."
민제호의 예상은 빗나갔다. 웬일인지 이승만은 대한민국 프레지던트라는 명함을 만들고 워싱톤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노령정부, 상해정부, 한성정부 등 세 개가 있는 것으로 대외에 알려지고 있었다.
신규식은 병석에서 일어나 백주원, 김태수와 함께 상해로 복귀했다. 박찬익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나무랐다.
"형님, 형님이 계셨더라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신규식의 제안이 아니었더라도 뜻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부 통합을 원하고 있었다. 우선 연락이 용이한 노령 정부와 협상이 시작되었다. 노령정부 대표 원세훈이 상해로 왔다. 신규식은 백주원과 함께 그를 만났다. 원세훈은 신규식보다 8년 연하였다.
"원 동지, 이상설 선생과 함께 고생하셨다는 얘기는 일찍부터 들어 경하하고 있었소. 부디 통합 협상을 성사시켜 주시오."
이승만은 5월 30일 국무총리 선출 통고를 받고도 계속 미국에 머물렀다. 그는 상해정부와 노령정부가 통합 협상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강하게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협상을 벌이던 두 정부는 타협점을 서둘러 모색했다. 단일정부의 염원이 그만큼 높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단일 정부는 한성정부를 계승하되 정부의 위치는 상해에 두며 현재 각료는 사퇴하고 한성정부의 각료가 정부를 인계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실체가 없는 한성정부를 인정한 것은 이승만의 배후 계산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그의 의도가 모두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혹시라도 미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상해정부가 중심이 되어 노령정부와 합작하고 한성정부의 입장을 반영하는 단일정부가 성립되었다. 대통령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 국무총리는 노령정부의 이동휘가 선임되었다. 신규식은 중국 광동정부의 수반 손중산과 중국 정부 교통부장이며 차기 운남성 총독으로 내정되어 있는 당계요에게 단일 정부 수립을 통지했다.
임시정부 청사는 신규식이 얻은 프랑스 조계 보창로의 3층 건물로 확정했고 곧 이어정부 현판이 붙었으며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이 청사에 자부심을 느낀 동포들로부터 성금이 답지했다. 임시정부 직원들은 대한민국 배지를 자랑스럽게 차고 다녔다.
상해의 독립 운동가들은 신규식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의 중국 내 위력을 오히려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입각을 권유했다. 신규식은 측근들과 입각 문제를 상의했다. 민제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입각을 찬성했다. 민제호는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은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신규식은 임시정부 법무부장에 취임했다. 미국에서 안창호, 박용만, 노백린 등이 상해로 건너왔다. 신규식은 노백린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 두 사람은 11년 전에 있었던 서소문 의병 전투를 회상했다. 지도자 급 인사들이 상해로 오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조국 광복의 의지를 다지며 상해로 몰려들었다. 1920년 한 해 동안 2,000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몰려들었다.
상해로 온 지사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김가진과 그의 아들 김의한이었다. 일찍이 조선총독부로부터 구한국 중추원 칙임관 자격으로 65세에 작위를 받았던 동농 김가진은 3·1운동에 충격을 받고 아들과 함께 상해로 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하던 혁명사업도 열정이 식어 버릴 나이인 74세에 조국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경하 받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시문과 서예에도 최고 수준을 가진 예술가였다.
힘든 여정으로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의 침대에 누운 그는 몰려드는 각국 기자들에게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상해의 신문들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고 중국 전직 총리인 당소의가 문병을 오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교민 사회의 사기가 오른 것은 물론 한국 지사의 높은 의기가 내외에 과시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몇 년 후 그는 상해에서 노환으로 죽었지만 그의 아들 김의한은 성엄이란 이름으로 활약하면서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지키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가 다음 해 상해로 와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정성으로 도우면서도 틈나는 대로 국내에 잠입해서 적지 않은 군자금을 모아온 점이었다. 그녀 역시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조선의 여인으로 활약한다.
한편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간 김규식의 직함은 임시정부 외교특사로 바뀌었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파리에 도착하여 샤토당가 38번지에 집을 임대해 활동에 들어갔다. 상해에서는 6월과 7월 조용은과 여운형을 각각 대표단에 합류시켰다.
그러나 엄청난 자금을 쏟은 파리 외교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파리회의의 실패는 독립운동의 노선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무장 항쟁론을 드세게 제기하기 시작했다. 주로 사회주의 계열에서 제기되는 이 주장은 이승만에 대한 불신과 맞물려 있었다. 평소 실력을 더 길러 독립하자고 주장했던 안창호까지 임시 정부의 새로운 창조론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승만에 대한 반발이 사태를 증폭시키고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비난의 포문을 먼저 연 것은 신채호였다. 문제는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에서 불거졌다. 1919년 3월 17일 자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이 파리회의에 참석하는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한국은 당장 독립될 가망이 없고 또 독립된다 하더라도 자치 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주관하여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한국을 당분간 통치하게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는 것이었다. 제출자는 이승만과 정한경이라고 했으며 그들은 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표라고 되어 있었다.
사실 당시 이승만은 파리에 갈 비자도 얻을 수 없는 실력이면서도 파리회의 한국 대표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러자 대한국인회 중앙총회장인 안창호는 이승만을 믿고 대표 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며칠 후 이승만으로부터 아주 실망스러운 편지를 안창호는 받는다. 이승만은 세 가지를 제의하면서 회장의 재가를 요청했다.
1. 미국 정부의 경계인인 나는 파리에 갈 수 없으니 비밀리에 캐나다에 가서 파리 행을 모색해도 되겠는가? 2. 아니면 파리에 있는 헐버어트 박사에게 우리 일을 위임해도 되는가? 3. 귀국하는 윌슨 대통령에게 원조를 청해도 되겠는가?안창호는 즉시 답변서를 보냈다.
1. 캐나다에 가더라도 파리 행은 불가능함. 2. 우리나라 일을 외국인에 위임하는 일은 불가함. 3. 윌슨 대통령을 만날 수 있으면 만나서 원조를 청해 볼 것. 윌슨을 만날 실력이 있다면 비자를 못 받을 리가 없었다. 이승만은 대뜸 위임통치청원서를 써서 백악관과 언론에 보낸 것이었다.
신채호는 의정원에서 국무총리를 선출하기 전에,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는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라고 이승만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상해에 와서 첫 각의를 주재할 때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건의했다.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 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에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승만은 경련기 있는 어조로 말했다.
"회의 벽두부터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납니다. 우리는 미국과의 외교에 전력을 집중해야 하며 또 집중한 만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입니다. 그러므로 철회할 의향이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