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는 무조건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저는 초일류 학교를 만들기 위해 선생님 섬기기 운동을 적극 펼칠 것입니다."
지난 3일 오전 9시 20분, 서울 ㄱ초 운동장. 이 학교 김 아무개 교장이 인사말을 시작했다. 김 교장이 임원을 맡고 있는 외부단체인 '선생님 섬기기 운동본부'(운동본부)가 이 학교와 함께 연 '어린이날 축하 및 섬김과 사랑의 기념식' 자리다.
"I ♡ TEACHER" 교사들도 반발하는 까닭
초여름 뙤약볕, 인조 잔디 위에 서 있는 전교생 2300명 가운데 절반가량은 땀을 닦아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김 교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선생님 섬기기 배지 달기가 시작됐다.
6학년 학생들이 1학년생 가슴에 'I ♡ TEACHER'라는 글귀가 적힌 배지를 일제히 달아줬다. 1학년 한 남학생은 "이 배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아느냐"란 물음에 "왜 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지를 달지 못한 학생들도 일부 눈에 띄었다. 5학년 한 남학생은 "올해엔 배지를 사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말끝을 흐렸다.
선생님 섬기기 운동 배지 달기. 정작 가장 고맙게 이 행사를 지켜봐야 할 이들은 교사들이다. 하지만 이날 교사들의 표정은 뜻밖에 밝지 않았다.
'교사 섬기기'란 좋은 구호와 달리, 정작 교사들은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일부 교사들은 "평소 교사 '섬기기'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한 교장이 보여주기식 행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수의 교사가 반대하고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학교단체 임원을 맡고 있는 한 지역인사도 "학교 안에서는 교장의 독단 때문에 학교가 썩고 있는데 겉으로 배지만 달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김 교장이 한 개에 1000원씩 가격을 매긴 배지 판매 가정통신문을 학부모들에게 보낸 때는 지난 4월 19일. 교과부가 불법찬조금, 촌지 금지 등을 규정한 지침을 일괄 폐지한 지 4일 뒤다.
김 교장은 운동본부장과 공동 명의로 보낸 이 통신문에서 "5월 한 달 동안 배지를 달고 다니는 교육활동을 실천하려고 하니, 학부모님이 배지를 구입해 달라"고 적었다.
이어 통신문은 배지를 구입할 학생과 학부모 이름, 희망 개수 등을 적도록 했다. 한 3학년 학부모는 "아이 맡긴 부모 입장에서는 효과도 없는 이벤트라는 걸 알면서도 살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배지 1만개 제작 "값도 정말 비싸요"
김 교장과 운동본부가 제작한 배지는 모두 1만 개. 윤 아무개 운동본부장은 "배지는 지난 해에 만든 것인데 단가는 한 개마다 600원씩 줬다"고 말했다. 학부모 주머니에서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배지 1만 개 비용 1000만원가량이 나간 셈이다.
지난해 학부모회 임원을 맡은 바 있는 한 학부모는 "배지 값 1000원도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인터넷에 올라 있는 배지 업체 단가를 확인한 결과 5000개 제작 기준으로 단가가 100~200원이었다.
이 학부모는 또 "학부모 임원들이 지난해에 10만원씩 선생님 섬기기 기부금을 냈다"고 털어놨다. 불법 찬조금 수수 의혹이 이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서울시교육청 교원정책과 중견 관리는 "민원이 접수됨에 따라 불법 여부를 가리기 위해 해당 지역 교육청에서 감사를 하고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교육청의 직전 교육장이 지난해 운동본부 임원을 맡았던 점에 비춰보면 감사가 제대로 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이 학교는 이것 말고도 김 교장이 펴낸 <어린이 리더십> 책을 학교 돈으로 한꺼번에 구입해 말썽을 빚고 있다. 재량학습 수업용 명목인 이 책과 전현직 교장이 쓴 <독서와 논술> 구입 값만 3년에 걸쳐 1300만원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김 교장은 "지금 선생님 섬기기가 교육경쟁력 강화를 위한 최우선 과제"라면서 "학생들에게 이런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교육적으로 배지를 달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운동본부 일을 처음 하는 것이라 일부 학부모 민원이 생기는 등 문제점이 있었다"고 시인하면서도 "특정 단체에 가입한 교사들이 자기들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교장을 공격해 없는 일도 왜곡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반박했다.
비싼 배지 제작 비용 논란과 관련해 윤 운동본부장은 "당신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것을 물어볼 수 있느냐. 증거를 대라"고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었다.
불법 찬조금, 촌지 금지 지침 사라진 뒤...
기자가 만난 이 학교 10여 명의 교사와 학부모들은 요즘 긴장하고 있었다. 교과부가 발표한 이른바 '학교 자율화 추진 계획'이 결국 교장의 독선만 키우는 '학교장 자율화'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교사는 "교무회의에서 말 한 마디 했다고 윽박지르는 일부 관리자들의 비민주적 모습을 교과부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나마 정부가 갖고 있던 교장과 교육청에 대한 지도감독권을 폐기하니까 교장과 교육청만 살판이 났다"고 말했다.
군사분계선 등 철책선에서나 볼 수 있는 가시철망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되어 학생들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3일 '선생님 섬기기 운동'을 선포한 서울 ㄱ초 운동장과 맞닿은 화단이 바로 그 곳이다. 가로 5m 세로 1m 크기의 화단을 에워싼 철망에는 쇠바늘 세 배 두께의 가시가 수백 개 이상 돋아 있다.
이날 오전 초등학교 1, 2학년생들은 이 가시철망 주변을 지나며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 뛰다 간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학교 관계자는 "올해 3월 교장이 설치하라고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 아무개 교장은 "새싹이 돋아나는데 아이들이 자꾸 올라가 밟고 그래서 철망을 깔아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가시철망이 설치된 장소는 이곳만이 아니다. 학생들이 오가는 길옆에도 100m 가량이 더 깔려 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이 학교 교사는 "교장 선생님이 '선생님 섬기기 운동'이란 이상한 운동만 할 게 아니라 아이들을 섬기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