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첫날, 경북 청송의 주왕산 국립공원을 '말 달리며 스치듯 보고' 왔다. 굳이 '주마간산'이라 표현한 것은 우리가 거기 머문 시간이 고작 두어 시간, 무심하게 제3폭포까지 올랐다 내려오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백두대간 능선에서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빚어놓은 이 수려한 산자락의 그늘에 들어서다 만 것에 지나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맑고 아름다운 계곡을 품은 기묘한 바위 봉우리의 바위산[암산(巖山)], 주왕산이 열두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때는 1976년 3월이다. 그리고 30년, 주왕산은 온 산에 출렁이는 신록의 물결과 계곡마다 불타오르는 '수달래'의 향연으로 나그네를 맞고 있었다.
'청송'의 이미지는 이율배반이다. 사람들은 청송을 아름다운 산 주왕과 함께 지금은 청송제3교도소로 바뀐 청송보호감호소를 떠올린다. 이두용 감독의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의 흑백 포스터로 각인된 경상북도 북부, 그 외진 고장의 철창에 갇힌 인생유전과 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명산의 이미지는 어우러질 수 없는 모순 관계인 까닭이다.
주왕산(周王山·720.6m)은 원래 바위가 병풍을 두른 듯하대서 석병산(石屛山)으로 불리었던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산(周房山), 산경표에는 주방산(周方山)으로 표기되어 있었다는데 주왕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신라 말께라고 한다.
"경북 외진 산골짜기에 웬 주왕? 필시 모화사대((慕華事大)의 찌꺼기일 테지?""당근이지 않을까요. 이 땅에 어디 중국의 땅이름을 본뜬 곳이 한둘이라야 말이지요…."나그네들은 산 이름을 두고 객쩍은 의견을 심드렁하게 주고받았다. 짐작하였듯 이 산의 이름은 중국의 주왕이 등장하는 전설과 이어진다. 당연히 우리는 '소중화(小中華)'에 푹 빠진 조선조 샌님들을 떠올렸으나 가만있자, 때가 신라 말기라면 좀 다르지 않나 싶다.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산 이름으로 좌정한 이는 중국 진나라의 주도라는 사람이다. 그는 당나라 때, 스스로를 후주천왕이라고 부르며 진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역모는 실패하고 그는 군사를 끌고 이곳 청송 땅으로 몸을 피했다. 산으로 숨어든 주왕은 산문이 되는 주방천 협곡에 산성을 쌓고 재기를 꿈꾼다.
그러나 그는 당나라의 요청으로 토벌에 나선 신라 군사에 의해 주왕굴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래서인가, 주왕은 이 산자락에 적지 않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있다. 시대나 그에 따른 나라 사이의 세력 관계 등에서 이 전설의 현실적 개연성은 넉넉해 보인다.
그러나 청송의 향토사학자 김규봉씨는 "주왕을 중국에서 온 이가 아니라 나말에 반역을 꾀했던 인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주왕사적(周王事蹟)'의 연구"를 통해 이 산 이름이 빈번히 왕권이 교체되는 등의 정치적 혼란기였던 신라 하대에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과 그의 아들 김범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석한다. 920년께 낭공대사가 썼다는 <주왕사적>에 기록되어 있는 주왕산의 전설이 그 근거라는 것이다.
김헌창은 선덕왕에 이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왕권을 빼앗긴 김주원의 아들이다. 김범문의 제자였던 낭공대사는 김헌창의 난을 중국의 이야기로 숨기는 방식으로, 쉬 드러낼 수 없었던 혁명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개연성도 앞서 언급한 주도의 전설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훨씬 극적인 역사의 아픔과 '역사 기록의 메타포'를 드러내는 이야기인데 이를 '전설의 주체화'라 풀이할 수 있을는지.
주왕산을 여느 산과 구별 짓는 꽃이 수달래다. 수달래는 '수단화(壽斷花)'라고도 하는 진달래과의 낙엽성 관목이다. 꽃 모양이 진달래와 비슷하나 진달래보다 더 진하고 꽃잎에 검붉은 반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수달래는 주왕산 일대에만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다.
주왕산 인근에서야 수달래로 통하지만, 이 꽃의 정식 이름은 '산철쭉'이다. 수달래는 당연히 전설의 주왕과 이어진다. 둘 다 패자의 운명을 비켜가지 못했으니 그가 어떤 주왕이어도 무방할 터이다. 주왕이 주방천을 붉게 물들이며 숨지고 난 이듬해부터 물가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났다는 꽃이다.
이곳 주민들은 수달래가 주왕의 피와 눈물로 피어난 넋으로 여긴다. 그래서 해마다 청송군에선 주왕의 넋을 달래기 위해 '수달래제(祭)'를 베푼다. 연분홍으로 곱게 물들며 더러는 선홍의 핏빛으로 익어가는 이 봄꽃에 깃든 패배의 운명과 역사는 애달프지만 아름답다.
주왕산 수달래제는 이미 지난 달 하순에 베풀어졌다. 축제가 끝났지만 수달래는 제3폭포로 오르는 계곡을 잇달아 무연히 불타고 있었다. 햇볕 드는 곳의 사질 양토에 잘 자라는 특성대로 수달래의 불길은 계곡의 바위와 물가의 돌무더기를 현란하게 수놓고 있었다.
주왕산의 수달래가 상춘객들의 눈에 아프게 박히는 것은 계곡과 산등성이에 빽빽하게 들어찬 숲의 초록빛 배경 탓인지도 모른다. 주왕산 특유의 식생으로 알려진 신갈나무와 소나무 군락이 펼쳐내는 신록의 물결은 황홀하기만 하다.
신록의 빛깔은 특정할 수 없다. 그것은 날마다, 그리고 보는 각도에 따라 훨씬 다른 결로 읽힌다. 일렁이는 바람에 따라 연록빛으로 빛나는 가지는 가볍게 머리채를 흔들며 이어지는 그 신록의 물결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때가 때인지라 계곡의 수량은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쉼터 아래 계곡에 흐르는 물은 맑디맑다. 모래와 돌 틈에서 몸을 뒤채는 물고기들도 여유로워 보인다. 눈부신 신록과 맑은 물에 비치는 원색의 등산복 차림으로 분주한 사람들의 행색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1시간 가까이 올라 만난 제3폭포에서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발길을 돌린다. 똑같은 길을 되짚어 오는 길이건만 하산 길의 느낌은 남다르다. 그것은 마치 지나온 시간과 삶을 대칭으로 복원하는 듯한 기분이다. 오르던 길에 견주면 주변의 풍광은 훨씬 더 익숙하고 무던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 몸은 어느덧 심해(深海)같이 유수(幽邃)한 수목(樹木)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至賤)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 정비석 <산정무한> 중에서광대무변한 자연의 위대한 순환 앞에 선 인간이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 온갖 미사여구로 그 자연을 기리지만, 그 몇 마디 말글의 묘사가 미치는 것은 거기가 거기일 뿐이다. 반세기도 전에 발표된 <산정무한>의 묘사는 2008년 현재, 주왕산의 신록에도 마치 동심원처럼 겹쳐진다.
심해 같은 수목, '단풍의 산, 바다'는 바로 '신록의 산과 바다'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21세기, 레저 시대에 걸맞게 계곡을 따라 잘 정비된 산길 덕분에 나무의 심해는 한 발 저편에 있지만 초록의 산과 바다는 바야흐로 우썩우썩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국립공원 입장료는 없어졌으나 산 어귀에 버티고 선 절집이 징수하는 문화재 관람료를 피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불한 2천원 때문에 당당하게 절집을 통과하여 산을 벗어난다. 널찍한 음식점에 앉아서 산에서 나는 풋것들, 취나물과 어수리 나물을 맛보며 우리는 이곳이 깊은 산읍, 주왕산이란 걸 실감한다.
그러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늦은 점심을 들고 우리는 절골 너머 '물안개와 왕버들의 호수' '주산지(注山池)'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