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배우에게는 남다른 기품이 있다. 말과 걸음과 서고 앉는 모습에까지 깃든 기품은 '나는 배우요'라고 말한다. 배우 오현경의 무대 나이는 올해로 55세. 배우로서 이만한 시간을 무대에 쏟아 왔으니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서울고 다닐 때 연극이 얼마나 하고 싶었던지 말이에요, 결국 고2 때 직접 학교에 연극부를 만들었어요. 친구들과 모여 연극을 했지요. 아주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대학도 연극이 하고 싶어서 연세대를 지원했었어요. 당시 오하섭 선생님이 연세대에서 연극을 가르친다고 들었거든요. 졸업 후에도 계속 연극을 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먹고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TV가 생겨났는데, '이거 잘 됐다, 여기서 돈 벌어서 이 돈으로 연극하자'는 생각으로 방송을 나가기 시작한 거지요.(웃음)"
두 번의 큰 암 수술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무대에 선다. 죽기 전에 '관객의 가슴에 남을 만한' 작품을 올려야 한단다. 병으로 자신의 생활을 잃거나 정리해 버리고 마는 사람들도 있건만 그는 다시 무대에 오르고 있다.
"배우는 무대에 목숨을 걸고 올라가는 거예요. 연극은 그때 왔던 관객이 아니면 모르잖아요. 배우는 한 번의 무대가 전부인 거예요. 지금 석 달 넘게 연습해 오고 있지만 아직도 할 게 많습니다. 극단 미연의 <주인공>(5월 13일~16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을 선택한 건 디테일한 연기가 필요한 작품이었기 때문이에요. 리얼리즘 연극은 쉬워 보여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의 일상을 보여주려면 동네 아저씨가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배우를 쓰겠어요? 연극적인 표현과 연기를 일상처럼 느끼게 해야 하거든요. 이 작품이 특히 그렇습니다. 섬세한 묘사와 호흡이 아주 중요합니다."
부인은 윤소정씨이고, 딸은 오지혜씨이다. 이 관계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오현경이라는 인물의 꼿꼿한 성격이다. 연습시간에 늦는 적이 없으며, 잘못된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옛날에는 대가 있어서 쭈욱 내려왔거든요. 선생과 제자, 선배와 후배라는 관계가 아주 중요했어요. 우린 그 속에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가르쳐 주고 끌어 주는 사람 없어도 그냥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작품과 극단들을 만나 보게 됩니다. 난 이게 자유스럽고 좋더라고요. 그런데 가끔 빗나가는 경우가 있어요. 발성은커녕 발음도 안 되는 배우들이 나와요. 기본 연습도 안 했다는 거 아닙니까? 아마추어적인 작품인데 돈은 똑같이 받아요. 이거 이래서 되겠습니까?"
마음이 깨끗하고 성격은 솔직하니 말에 거리낄 것이 없다. 지난 2일 인터뷰 내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다 싣지 못함이 안타깝다.
좌우간 모든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는 한 가지는 자신이 배우임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배우의 양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배우의 양심은 오직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에요.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문을 나설 때 직감적으로 압니다. 오늘 나와 호흡을 같이 한 관객이 있는지 없는지 말입니다. 배우가 기쁜 것은요, 객석에 앉은 관객 중 단 한 명이라도 나와 호흡을 같이 한 누군가가 있을 때거든요. 그때의 그 기쁨은 정말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최선을 다 하지 않은 무대에서는 절대 그 느낌을 얻지 못합니다.
관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교감이 있었을 때 공연 본 맛이 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자면 관객 역시 마음을 열고 매너있는 자세로 공연을 관람해야 할 겁니다. 그것이 관객의 양심이 아닐까요?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이 모두 최선을 다 하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우리가 종종 잊고 마는 것이지만 최고의 공연에는 최고의 관객이 필요하다. 어느 날 최고의 관객이 모인 극장 안에 앉았을 때, 그리고 무대 위에 최고의 배우가 나왔을 때, 그 날의 관객은 직감적으로 느낀다. 오늘의 공연은 볼 만하다는 것을. 작품의 제목처럼 배우와 관객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무대를 만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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