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들은 어머니를, 형님과 동생은 누님을 병문안 갔다가, 생각지 않던 난상토론이 벌어졌는데요. 처음 있는 조카들과의 토론을 이명박 대통령 덕이라고 해야 할지,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국민 덕이라고 해야 할지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5월 2일에 큰 누님을 뵈러 오겠다고 약속했던 형님이 교육에 참가하느라 토요일 저녁에야 오셨습니다. 바빠서 오지 못할 것으로 알았던 동생이 제수씨와 함께 형님 내외분을 모시고 와서 더욱 반갑더라고요.
남해고속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6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는데, 인사할 겨를도 없이 조카들이 기다리는 몰운대로 향했습니다. 강변도로를 30분쯤 달려 아파트에 도착해 반기며 인사를 했지만, 동생들을 잘 몰라보는 큰 누님 때문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군산에서 온 형님 내외와, 동생 내외, 경기도 파주와 수원에서 온 조카들과 조카며느리가 부산에서 만나 큰 누님과 함께 하룻밤 한나절을 보냈는데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술상이 차려 나왔습니다.
첫 날 안주로는 돼지고기 수육과 오리 훈제구이였고, 이튿날 점심때는 붕장어(아나고)와 밀치 회 낙지 등 해산물이었는데, 마침 배가 출출한데다, 형제들이 모인 자리라서 맛이 더했습니다.
'사람은 폭을 잘 잡아야 한다'라는 생전의 어머니 말씀이 떠오르더라고요.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뭔가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떠올리며 위안을 삼아왔는데, 안주가 부족해 미안해 하는 조카에게 말했습니다.
"이게 '밀치'라고 했지? 보기보다 맛이 좋은데, 아무튼 사람은 폭을 잘 잡아야 허는 거라고·· 부족할 때마다 불만을 터뜨리면 스트레스만 쌓이니까, 전라도 말로 '이거라도 어디여~' 정신으로 살면 마음이 편하거든·· 다시 말해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면 싼 생선도 맛있다는 얘기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자주 하셨던 말을 인용했다고 하자 형님과 조카들도 웃음을 터뜨렸고 숙연했던 분위기도 조금 풀렸습니다. 고급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여럿이 모였다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몸이 불편한 큰 누님을 뵈러 왔지만, 형제들의 만남은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술잔이 몇 차례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대화는 시냇물 흐르듯 이명박 퇴진을 요구하는 사이버 서명운동과 촛불 시위로 이어지면서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60대 삼촌과 50대 조카들의 난상토론
삼촌과 조카들의 술자리 토론은 4일 저녁에서 5일 점심때까지 이어졌는데, 재해나 다름없는 대운하 공사에서부터, 땅 부자 내각과 청와대 수석들의 땅 투기,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하는 촛불시위 그리고 이명박 퇴진 사이버서명운동 등이 주제가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촛불시위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저는 부산의 교통 중심지인 서면에서도 촛불시위가 열렸다는 것과 부산대학교 학생들도 시위하기 시작했다며 부산 소식을 중심으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텃밭이니 누구의 음모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한나라당 처지가 난처했을 것입니다"라는 쉰 네 살의 큰조카 답변에 형님은 "아무리 잘못해도 선거 때면 부산 시민들이 지지해줄 것이라고 믿는 한나라당의 썩은 정신이 정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라며 걱정하더라고요.
댓글 하나 달아본 적 없지만 <오마이뉴스>를 즐겨찾기에 올려놓고 눈팅을 즐긴다는 형님은 "국회에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요구한다는 사이트가 개설되어 있다는 댓글을 보고 곧장 달려가 40만 명이 되기 전에 서명했다"라며 이명박 대통령의 '조공협상'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우리 나이로 예순여섯 살인 형님을 저는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는 21세기 노인, 아니면 새롭게 자리 매김되는 신중년층으로 봅니다. 한때 외항선원으로 오대양을 누비고 다녔고, 팝을 즐겨 부르며, 멀리 나갈 때마다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거든요.
마침 9시 뉴스를 알리는 아나운서 멘트가 시작됐는데, '방송은 꼴도 보기 싫으니 우리 얘기나 하자'는 의견이 일치해 TV를 끄고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소주잔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열기도 그만큼 뜨거워졌지요.
광우병이 의심되는 미국 쇠고기를 값싸고 좋다며 홍보하는 이명박을 보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헷갈린다는 제 말에 형님과 조카들은 하나같이 "이명박이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계속 우긴다면 앞으로 3개월 버티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하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람 마음은 다 같은 모양입니다.
형님은 생각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만 해도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후보 시절 위장전입과 위장취업 등 추잡한 비리들이 하나 둘 터지면서 적극반대로 돌아섰다"라고 하더라고요.
부산에 20년 넘게 살다 작년에 경기도 파주로 이사 간 큰조카는 "미국은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쇠고기를 수입해다 먹으면서 자기들이 기른 소는 왜 한국에 수출하려고 하는지 그들의 속내를 잘 파악해야 한다"라면서 공무원 신분이라 비판을 함부로 못하겠다며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큰조카는 이어 "부산 시민들은 차떼기를 해도 성추행을 해도 한나라당을 찍었다"라면서, "지금이니까 그렇지, 광우병이든 조류독감이든 다음에도 한나라당 후보를 찍을 것이니 시간이 지나면 말짱 도루묵이 될 것입니다"라며 한숨을 짓더군요.
지역 이야기와 함께, 나만 잘되면 이웃이 죽어도 좋고, 나라가 망해도 자신의 집값만 올려놓으면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는 천민자본주에 세뇌된 국민의식이 문제라며 서민을 핍박했던 박정희의 유신독재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비록 병원에 입원해있는 큰 누님을 뵈러 왔지만, 오랜만에 만들어진 삼촌들과 조카들의 술자리는 시간이 갈수록 빈 술병 숫자가 늘어났고, 한 병씩 비울 때마다 토론 열기가 더욱 달아올랐습니다.
고객 관리 차원이라고 하지만 노트북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시사에 밝은 형님은 일부 수구언론이 말하는 괴담도 작년에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려고 만든 것이지, 지금 퍼진 게 아니라며 일부 언론과 한나라당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비판했습니다.
해군을 제대하고, 외항선원 경력이 있는 형님은 대운하 건설을 지적하며, 3천 톤급 배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돌아가는 스크루로 말미암아 생기는 물살의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며 설명해주었는데 옮기지 못해 안타깝네요.
옆에서 주로 듣기만 하던 작은 조카가 "이명박이 부시와 쇠고기 협상을 벌일 때 정육점 주인과 여중·고생 중에서 몇 명을 선출해서 한국 측 대표로 옆에 앉혔으면 촛불시위는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뼈있는 농담을 해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점심을 먹고 헤어질 때까지 토론이 이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우려와 이명박 대통령 퇴진 사이버 서명운동이 예민한 문제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다른 가정과 직장에서도 저희처럼 토론이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촛불시위 현장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하늘의 명령으로 알고 재협상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지금처럼 말 바꾸기로 전 정부에 책임을 전가하고, 국민을 기만하거나 야당의 정치공세로 몰면서 힘으로 막으려 한다면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직면하게 될 터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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