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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주민중항쟁 28주년이 되는 해다. <오마이뉴스>는 1980년 5·18 당시 고교생의 신분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한 '고교생 시민군'의 회상기를 연재한다. 세월이 흘러 '고교생 시민군'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아직 미흡한 상태다. <오마이뉴스>는 이 연재가 '고교생 시민군'의 활동 내용을 통해 5·18을 성찰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편집자말]
 80년 당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광주지역 고등학생들.
80년 당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광주지역 고등학생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고교생 시민군'의 첫 일은 돌멩이 쪼개서 나눠주기

1980년 5월 21일. 휴일 같은 기분에다 어제 시위에 참가해 피곤해서인지 오랜만에 오전 10시경까지 늦잠을 잤다. 시끄러워 눈을 떠보니, 옆방의 1학년 후배 김순구가 야단법석이다. 조금 전에 농성동 로터리에 갔다가 목격한 시위 장면을 실감나게 설명했다.

순구의 현장 설명은 계속됐다. 성난 시민들이 전날 광주시내 일원에서 자행됐던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듯 군인들을 뒤쫓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대의 시위대 차들이 시민들이 모여 있는 농성동 로터리를 거쳐 시내 쪽으로 지나갔다고도 했다.

하숙생들과 농성동 로터리에 갔다. 로터리 광장에 도착하기도 전인데 최루탄 냄새가 곧바로 눈물샘을 자극했다. 눈이 따갑더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채기와 함께 콧물도 흘러내렸다. 함께 시위를 구경하던 아저씨가 손으로 눈을 비벼대면 더 따갑다고 말해 눈을 만질 수도 없었다.

벌써 시민들과 계엄군들 간에 한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터리 광장 한복판에 이르자, 송정리 방향 넓은 도로에서 수백여 명의 시민들이 계엄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계엄군들이 최루탄을 쏘면서 공격하면 시민들은 최루탄을 피하여 후퇴하곤 했다.

시위를 지켜보던 나도 하숙생들과 시위에 합류했다. 처음에는 시위대 후방에서 '무기'를 제조하고 공급하는 일을 했다. 하숙생들과 함께 시위대 뒤쪽에서 시민들의 유일한 무기인 돌멩이와 벽돌 조각을 던지기에 알맞도록 쪼갠 뒤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시민들과 계엄군간 치열한 공방이 계속됨에 따라, 후방에서 한가롭게 무기를 제작하고 보급하는 일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나도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최일선으로 자원했다. 계엄군들과 지근거리에 위치한 최전방으로 이동하여 돌멩이와 벽돌 조각을 던졌다.

저만치에서 떨어져 시위 장면을 구경하던 동네 아주머니들도 투쟁 대열에 동참했다. 아주머니들은 '전장터' 인근에 있는 주택을 오가면서 세숫대야와 양동이에 수돗물을 떠다 놓고 시민들의 따가운 눈을 씻게 했다.

시민들은 계엄군들이 쏜 최루탄이 터지면서 퍼져 나온 최루가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해 아주머니들이 떠다놓은 수돗물로 얼굴을 씻고 다시 '전의'(戰意)를 가다듬곤 했다. 광주-송정리간 도로 아스팔트 바닥에는 밀가루처럼 하얀 최루가스 분말이 여기저기에 한 움큼씩 쌓여 있었다.

시민들과 계엄군의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돼, 양측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할수록 길바닥에 깔려 있는 최루가스 분말도 덩달아 흩날리면서 춤을 췄다. 이 바람에 시민들의 눈과 코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계엄군과 최일선에서 싸우던 최전방의 시민들이 전술상 후퇴하면 후방에 있던 시민들이 맨 앞으로 돌진, 계엄군들과 싸웠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시민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시민들 가운데 최루탄 피해자가 속출했다.

어떤 시민은 계엄군이 쏜 최루탄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몸에 맞아 다쳤다. 어떤 시민은 도망치다가 하필이면 최루가스 분말이 쌓여있는 곳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은 물론이고 온 몸에 최루가스 분말로 뒤범벅이 되어 눈물 콧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계엄군과 시민들의 공방전이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계엄군들도 농성동 로터리 광장에서 멀리 보이는 화정동 4거리 고갯마루까지 후퇴했다.

시민들은 곧바로 광-송간 도로변 목재소로 이동했다. 당시 농성동 로터리 광장에서 송정리로 가는 길인 광-송간 대로변에는 광주의 변두리였던 관계로 목재소들이 많았다. 광-송간 도로는 지금처럼 굵은 노란 실선 두 줄이 그어진 중앙분리대가 아니라, 화단으로 된 중앙분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는 화단에는 잘 다듬어진 키 작은 향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시민들은 목재소에서 지름이 한 아름이나 되고, 길이 5m가 넘는 통나무를 운반해서 광-송간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시민들은 적게는 5명, 많게는 10여명이 달라붙어 통나무를 도로로 옮겼다. 물에 젖은 통나무는 동아줄을 묶어 연결한 뒤 어렵사리 도로로 끌고 나왔다.

광-송간 도로는 순식간에 통나무 바리케이드로 성벽을 이루었다. 몇 겹으로 쳐진 통나무 바리케이드는 탱크도 뚫지 못할 것 같았다. 시민들이 통나무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이유는 비무장 상태인 시민들과 달리 완전 무장한 계엄군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통나무 바리케이드는 계엄군이 군부대(상무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한편, 만행을 저지른 계엄군을 붙잡아 응징하고, 계엄군의 재진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옛 상무대는 장성으로 이전했고, 현재 군부대 터는 택지로 개발돼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광주광역시청 등 관공서가 들어서 있는 등 광주광역시의 중심 지역으로 변해 있다).

 상무부대가 있던 자리는 신도심이 들어서 그날의 흔적을 찾기 힘들게 하고 있다.
상무부대가 있던 자리는 신도심이 들어서 그날의 흔적을 찾기 힘들게 하고 있다. ⓒ 임영상

시위대에 붙잡힌 계엄군

잠시 후, 광천동쪽 도로에서 함성소리와 함께 군 지프와 시위대 버스가 로터리 광장 쪽으로 오고 있었다. 앞에는 군 지프가, 바로 뒤에는 시위대 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군 지프에는 4명의 군인이 타고 있었다. 시위대 버스가 군 지프를 뒤쫓아 오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이들이 로터리광장에 다다르자 우리들은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것처럼 "와-"하는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반가운 함성도 잠시, 갑자기 상황이 돌변했다. 군 지프는 많은 시민들이 운집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는지 끼익 하며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멈춰 섰다. 뒤쫓던 시위대 버스도 급브레이크를 밟고 군 지프와 추돌위기를 면했다.

군 지프에 탑승해있던 군인들은 탄창이 꽂혀 있는 M16 소총을 거총하며 시민들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했다. 이들은 중위 계급의 장교 한 명과 세 명의 사병이었다. 돌멩이와 각목,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던 시민들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장교가 말했다.

"시민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짓밟았던 공수부대원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곁에 있는 31사단 소속입니다. 우리가 부대에 무사히 복귀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십시오."

장교의 말이 끝나자 군 지프는 서서히 상무대쪽으로 움직였다. 당황한 시민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놈들을 죽여라!"
"우리 시민을 죽인 놈들인데…."
"여러분, 죽음을 각오하고 저 놈들을 잡읍시다. 인질로 잡아서 계엄군에게 잡혀간 시민․학생들과 교환합시다!"

시민들이 여기저기에서 외쳤다. 군 지프는 도로를 가로질러 설치된 통나무 바리케이드를 설치했기 때문에 더 이상 가지 못했다. 시민들은 한발 한발 군 지프 쪽으로 접근해 갔다. 마치 고양이가 살아있는 먹잇감을 낚아채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것처럼 움직였다. 시민들의 손에는 돌멩이와 벽돌 조각, 각목은 물론이고 인근 주택에서 가져온 농사기구인 쇠스랑까지 들고 있었다.

시민들은 분노에 차 있었다. 이글거리는 시민들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질러 버릴 것 같았다. 이에 질세라 군인들도 거총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고 시민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짧은 시간, 긴장감이 무섭게 감돌았다. 다시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민들과 군인들의 팽팽한 기 싸움은 한 50대 아저씨의 한 맺힌 절규로 균형이 깨졌다.

"여러분, 저놈들이 내 아들을 죽였습니다. 목숨 아까울 것 없이, 먼저 간 내 아들의 뒤를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실성하다시피 외쳤다. 그리고 군 지프 쪽으로 용감하게 다가갔다. 어느새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은 수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시민들도 조금 전과 달리 함성을 지르고 간간이 돌멩이도 던지면서 군인들을 압박했다.

"경고합니다! 더 이상 다가오면 발포하겠습니다."

장교가 외쳤다. 그러나 목소리가 자신이 없어 보였다. 군 지프와 시민들의 간격이 30여m 까지 가까워졌다. 군인들은 시민들이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거총 자세로만 있었다.

"저놈들 총알이 없다!"

30대 초반의 청년이 외쳤다. 군대에 갔다 온 경험상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시민들도 동감의 표정들이었다. 시민들이 달려들려고 하자, 군인 두 명이 거총 자세로 지프에서 내렸다. 그리고 상무대가 있는 송정리 방향으로 쏜살같이 도망쳐 버렸다. 도망친 두 명의 군인은 장교와 사병이었다.

시민들은 함성을 지르며 각목, 돌멩이를 던지며 순식간에 군 지프를 덮쳤다. 예상대로 군인들은 실탄이 없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두 명의 군인은 시민들에게 실컷 맞았다. 얼마나 맞았던지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군복이 찢어져 속살이 보였다.

시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오래 놔두었다가는 군인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시민들도 의견이 나뉘었다.

"군인들이 시민들을 죽인 만큼 저 군인들도 죽여야 한다."
"아니다. 저 군인들은 공수부대원이 아니라 광주에 있는 31사단 소속 군인들이다. 따라서 죄가 없으니 살려줘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간 시민들 간에도 충돌이 일어날 분위기다. 이때 어떤 청년이 '전리품'인 군 지프에 올라가 시민들에게 외쳤다.

"시민 여러분, 그동안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봐서는 저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똑같이 군인들을 죽인다고 나서면 피의 보복이 계속될 것입니다. 여기 있는 이 군인들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향토사단인 31사단 소속 군인들입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군인들이 여러분의 자식들이고 동생들일 수도 있습니다. 살려줘야 합니다. 여러분, 살려줍시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 청년의 설득력 있는 연설에 수긍하는지 말이 없었다. 결국 두 명의 군인은 젊은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인근에 있는 개인병원으로 옮겨졌다. 시민들은 군데군데 모여 있거나 집으로 돌아갔다.

일부 시민들은 부근에 대기하고 있던 시위대 차에 탑승했다. 조금 전에 획득한 군 지프도 이미 시위대 차로 변해 있었다. 누가 선창했는지 모르지만 시민들은 '투사의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투사가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길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광주시민들이 시민군들에게 주기 위해 밥을 짓고 있다.
광주시민들이 시민군들에게 주기 위해 밥을 짓고 있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투쟁가가 되어버린 군가

지나가는 시위대 차에 올라탔다. 유리창이 모두 깨진 시외버스였다. 버스 안은 시민들로 북적댔다. 좌석은 물론이고 가운데 통로까지 시민들로 가득했다. 시민들은 버스 안에서 각목과 쇠파이프로 차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나도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본격적인 시위대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도로에서 지켜보던 시민들도 시위대 차들과 박자를 맞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며칠 전 하숙집의 대학생 형이 말했던 광주의 참상과 조금 전에 벌어졌던 계엄군과의 '일전'이 뇌리를 스치면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어제까지 품었던 호기심에 가득한 낭만적인 생각들도 모두 사라졌다.

외곽도로를 타고 백운동 로터리(현재는 고가도로가 설치되어 있음)에 이르렀을 때였다. 앞서 가던 몇 대의 시위대 차들이 멈춰 있었다. 내가 탄 버스, 그리고 뒤따라오던 차들도 멈추었다. 허름한 복장을 한 청년이 위험스럽게 버스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요지는 광주의 참상을 전 도민에게 알리자는 것이었다. 백운동 로터리에 모인 시민들과 시위대원들은 함성으로 동의했다. 이젠 시위대원이 따로 없고 전 시민이 시위대원이었다.

군용 트럭과 시외버스로 구성된 시위대 차는 주변 상가에서 나눠준 음료수 등 먹을 것을 싣고, 전남의 남부 방면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밝은 표정으로 노래를 불러댔다. 노래 제목은 '진짜 사나이'.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여
산봉우리에 해가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차들마다 돌림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제 각각 다르게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어떤 차에서 노래가 커지면 다른 차들은 그 차의 노래에 동화되어, 결국은 모든 차가 하나로 통일돼 주위가 떠나갈 듯이 불렀다. 10리 밖에서도 들릴 것 같은 노래 소리는 분명 도로변의 주민들에게 광주 참상을 알리는 데 큰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같은 방법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투사의 노래', '애국가',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시위대원들이 즐겨 불렀던 다른 노래들도 번갈아 부르면서 지친 심신을 달래고 대원들의 단합과 사기를 북돋웠다.

차 행렬이 나주군(현재 나주시) 남평면 소재지를 지나 나주읍을 거쳐 영산포읍(현재 나주시)에 도착했다. 연도를 지나던 주민들이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며 환영했다. 우리보다 먼저 다른 시위대 차가 왔는지 아니면 자체적인 조직이 움직였는지 모르지만, 나주군과 영산포읍 주민들도 벌써 읍내를 거닐면서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

영산포 읍내를 벗어날 때 시위대 차의 숫자를 세어 보니, 우리 차를 포함해 겨우 넉 대뿐이었다. 광주를 출발할 당시에는 모두 여덟 대나 됐는데, 나머지 차들은 먼저 가버린 듯했다. 이제는 내가 탄 차가 맨 앞에서 시위대 차들을 선도했다.

나주군을 지나 강진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영암군 신북면 소재지에 들렀다. 주민들에게 광주 상황을 알리고 뭉쳐야 한다고 외쳤다. 신북 주민들도 시위대 차를 따르면서 구호를 외쳤다.

우리들은 신북에서 잠시 머물다 영암읍으로 이동했다. 영암읍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월출산 등줄기를 넘고 있었다. 우리 시위대는 다른 지역처럼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영암읍내를 누볐다.

여전히 차체는 시위대원들의 박자를 맞추는 도구였다. 단단한 차체도 시위대원들의 각목 세례를 견디지 못한 듯 페인트가 벗겨지고 오그라졌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읍·면소재지 주민들처럼 이곳 주민들도 우리 시위대와 함께 시위를 했다.

우리는 시위를 끝내고 군청 옆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는 영암주민들이 제공해 줬다. 일행들과 잡담을 나누며 군청 안팎에서 휴식을 취한 지 1시간쯤 흘렀다. 군청 광장에 세워놓은 차들이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광주로 출발한다면서 차에 탑승해 달라고 전달이 왔다.

밤이 깊어졌는지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우리들은 주변에 모여 있던 주민들에게 뭉쳐 싸우자고 외치면서 차에 올랐다. 손을 흔드는 주민들을 뒤로하고 군청을 빠져 나와 다시 광주를 향해 달렸다. 피곤해서인지 시위대원들이 잠이 들었나 보다. 차 안은 침묵이 흘렀다.

우리 시위대 차들이 영암군 신북면 소재지를 막 지날 때였다. 갑자기 선도차가 멈추었다. 나머지 차들도 멈추었다. 밖을 내다보니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세 명이 선도차 옆에서 앞 차에서 내린 시위대원들과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조금 후에 시위대원이 우리 차에 올라 전달사항을 말했다.

"안내말씀 드립니다. 밖에 서 있는 아저씨들로부터 들은 계엄군 정보를 말씀드립니다. 저기 아저씨들은 지금 나주에서 내려오는 길이랍니다. 그런데 영산포를 지나올 때, 여러 대의 군 트럭에서 무장한 군인들이 내린 뒤 읍내 주요 도로변에 배치되는 것을 목격했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광주로 올라가면 위험한 만큼, 절대 광주로 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시위대는 다시 영암으로 가던지 아니면 더 내려가 강진으로 갈 계획입니다. 대원 여러분,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조치인 만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위대원들은 느닷없이 전달사항을 듣고 웅성거렸다. 어떤 대원은 오늘 밤 늦게라도 반드시 광주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대원은 집에도 못가고 군인들한테 붙잡혀 가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기도 했다. 또 어떤 대원은 빨리 영암으로 되돌아가 하룻밤을 묵은 뒤 각자 알아서 흩어지자고도 했다.

결국 시위대원들은 유턴하기로 결정, 다시 영암읍 쪽으로 달렸다. 시위대원들은 혹시나 영산포에 있다는 군인들이 뒤쫓지 않을까 지레짐작, 전속력으로 영암을 향해 달렸다.

다음날 우리는, 영산포에 군인들이 배치돼 있다는 어젯밤 아저씨들의 말은 거짓말이었음을 알았다. 우리가 영암군 신북면을 지날 때, 그곳 주민들이 우리 시위대를 자기 지역 사람들로 착각, 차를 멈추게 한 뒤 영산포에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괜히 지역 주민들이 시끄러운 광주에 올라가서 뜻밖의 화를 당할까 봐 걱정이 되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덧붙이는 글 | 이 회상기를 쓴 임영상은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과 건설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5.18#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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