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정말 물 맑다!"
"그러게. 이렇게 넓은 물길이 가는 내내 끝까지 이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대가천 물이 참 맑다."
"게다가 저 바위들 좀 봐! 어쩜 저렇게 멋지게 생겼대?"정말 그랬어요. 대가천을 따라 굽이굽이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는데, 둘레 경치가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물이 맑기로는 이루 말할 수가 없고, 한 굽이 돌 때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들이 얼마나 멋진지 모른답니다. 또 대가천 물길이 모여 '성주호(성주댐)'에 닿는데 짙푸른 물빛이 무척 보기 좋았답니다.
경북 성주를 거쳐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까지, 그리고 또 다시 길을 따라 되돌아오며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회연서원에 이르기까지 이틀(4월 26~27일)에 걸쳐 자전거 나들이를 했지요. 이곳은 지난해에도 두어 번 다녀간 적이 있는데, 그땐 그저 '무흘구곡(武屹九曲)'이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 이참에 발품을 팔아 하나하나 짚어가며 구석구석 살피고 돌아왔답니다.
천하 산 중에 어디가 가장 신령한가
인간 세상 이곳처럼 그윽한 곳 없을 듯
하물며 자양선생 깃들어 살던 곳
만고에 도덕 명성 길이 흘러내리네
'무흘구곡'은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한강 정구(1543~1620) 선생이 중국 남송 시대,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따서 '7언 절구'로 시를 지어 노래한 곳이에요. 대가천을 따라 가면서 바위와 나무, 물, 빼어난 경치를 골라 노래한 9곳을 일컫는 거랍니다. 성주에 1곡부터 5곡까지 있고, 김천에 6곡부터 9곡까지가 있답니다. 참, '무흘'이란 말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수도암' 올라가는 길에 있던 마을 이름이에요. 오늘 사진과 곁들여 자세하게 알려 드릴게요.
1곡 - 봉비암첫 구비 여울에다 낚싯배 띄우노라
석양 냇가 바람에 흔들리는 낚싯줄
뉘 알랴 인간 세상 온갖 생각 다 버리고
박달 삿대 짚고서 저녁 안개 헤치는 걸
'봉비암'은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회연서원' 바로 뒤쪽에 있는 바위랍니다. 일찍이 한강 선생이 이곳에 초당을 차려놓고 많은 제자를 길러낸 곳이에요. 한강 정구 선생과 회연서원 이야기는 뒤로 미뤄놓고 봉비암을 구경해 보세요.
시처럼 저녁놀이 지는 때는 아니었지만, 낚시하는 사람이 몇 있었어요. 가끔 혼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걸 보면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온 종일 저렇게 꼼짝 않고 앉아 낚싯대만 들여다보면서 지루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지요. 오늘 보니, 이렇게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 고기를 잡으며 온갖 어지러운 생각들을 잊어 버리려는 건 아닐까? 하고 가늠해 봅니다. 조금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어요.
봉비암 깎아지른 바위 위에는 한창 봄이 무르익어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고 오랜 세월을 부대끼면서 이리저리 휘어진 키 큰 소나무들이 참 아름다워요. 또 그 아래로 맑은 물이 흐르는데, 선생의 시처럼 낚싯배를 띄우면 더욱 멋지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 걱정 없이 즐길 수 있을 듯했어요.
2곡 - 한강대둘째 구비 미녀와 봉우리 되었다는 곳
봄꽃 가을 낙엽 단장도 고울시고
당시에 영균이 있어 알았더라면
이소의 하소연에 일장 설화 더 했을 걸
'한강대'에서 건너 바라보면 봉비암이 보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서 있는 이곳(봉비암)에서 보여야 하는데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건너편 쪽으로 가려니까 얕은 개울이 가로막혀 있었어요. 남편이 먼저 자전거 타고 건너가 보겠다고 하더니 이크! 그만 다 건너갈 즈음에 물이 깊어 발이 물에 빠지고 말았어요. 잘못하다간 넘어져서 사진기까지 다 버리겠다 싶어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건너기로 했지요. 아직 차가운 물에 발을 들여놓으니, 온몸이 찌릿하네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고 가서 한강대가 아니면 어떡하지?"
"뭐 어때, 돌아 나오면 되지…."이런! 아니나 다를까? 냇둑을 따라갔는데, 그만 길이 끊겨 있었어요. 여기가 아니었나 봐요. 또다시 그 개울까지 나와서 신 벗고 물을 건너왔지요. 큰길로 나와서 회연서원 앞을 지나다가 서원을 돌보는 아저씨한테 길을 자세하게 묻고 다시 찾아갑니다.
성주 국제 하키 경기장 바로 곁에 있는 게 한강대였어요. 미녀와 봉우리가 되었다는데, 이곳 또한 바위 아래로 물이 휘감아 도는데 꽤 멋지더군요. 선생의 시에서 말했듯이 가을에 단풍이 들면 더욱 아름답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3곡 - 배바위(무학정) 성주군 금수면 무학리셋째 구비 누가 배를 이 산골에 감추었나?
밤에도 훔쳐 갈 이 없이 천년 세월 지났네
건너기 어려운 강 얼마나 많겠는가마는
건네 줄 방도 없어 혼자 슬퍼하노라
대가천을 따라 가며 무학리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본 곳이 바로 이 배바위였어요. 물길이 꽤 넓었는데, 옛날에 대가천을 오르내리던 배를 매어두는 바위라고 하네요. 또 커다란 바위 위에 가까스로 얹힌 듯 뵈는 정자가 있는데, 저 위에 올라갈 이 있을까? 저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세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놀라웠어요. 지금은 배바위를 끼고 흐르는 물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풍경에 두 눈이 번쩍 뜨입니다.
4곡 - 선바위넷째 구비 백 척 바위에 구름 걷히고
바위 위 꽃과 풀은 바람에 나부끼네
그중에 그 누가 이런 맑음 알겠는가?
천심에 개인 달빛 못에 비치는 것을
이 선바위는 지난해 여름 우리가 다니는 자전거 모임 식구들과 함께 와서 야유회를 했던 곳이지요. 그만큼 물이 맑고 모래밭이 넓어 지금도 여름철이면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랍니다. 지금까지 본 바위보다 훨씬 큰데, 그 높이가 30m(100자)나 됩니다. 키 큰 바위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선바위'라고 합니다.
바위 아래 물가에는 진분홍빛 철쭉꽃이 군데군데 피어 깎아지른 바위와 어우러져 매우 멋스러워요. 한 가지 이 선바위 앞에 이정표가 눈에 몹시 거슬렸어요. '立巖 (lepam)'이라고 써놓은 게 참 한심스러웠답니다. 바위 이름이 '선바위'니까 영어로 바꿀 때에도 소리 나는 대로 쓰면 될 것을 굳이 한자말로 바꾸어놓고 그걸 다시 영어로 바꿔 썼으니, 이건 참 어이가 없더군요.
5곡 - 사인암다섯 구비 맑은 못은 얼마나 깊었는가?
못가에 솔과 대는 절로 숲을 이루었다.
두건 쓴 사람은 단 위에 높이 앉아
인심과 도심을 강론하여 말하네
사인암은 성주 땅에 있는 무흘구곡 마지막 풍경인데, 바위가 엄청나게 컸어요. 지금은 물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 옛날 한강 선생이 이 시를 쓸 땐, 꽤 깊었나 봐요. 또 이곳에 지난날 '사인' 벼슬을 지냈던 스님이 살았다 하여 이름을 붙였는데, 이곳에 온 사람마다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인연을 맺는다고 해서 '사신암'이라고도 하지요.
큰 바위를 휘감아 도는 물길 바로 위에서 층층이 떨어지는 물소리가 하도 예뻐서 동영상을 찍었는데, 그만 사진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제대로 찍히지 않아 몹시 아쉬웠어요. 사인암 앞에도 터가 넓어서 여름에는 사람이 많이 찾아온답니다.
6곡 - 옥류동여섯 구비 초가집이 물굽이를 베고 누워
세상의 근심걱정 몇 겹으로 걸어 막았네
고상한 그 사람은 이제 어디로 갔나
바람과 달만 남아 천고에 한적하네
이제 성주를 벗어나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로 들어갑니다. 여기는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옥류'라고 이름 붙였어요. '유성교회' 건너편에 있는데 여기도 저 아래에서 본 3곡 배바위처럼 바위 위에 예쁜 정자가 서 있어요. 바위가 그다지 높지 않고 야트막한데 아마도 그 옛날엔 이곳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나 봐요. 세상 걱정 다 잊고 살만큼 한적한 옥류동엔 바람도 쉬어가고 달빛도 머물다 가겠지요?
7곡 - 만월담일곱 구비 산 겹겹 돌여울을 둘렀는데
풍광은 이 또한 일찍이 못 보던 곳
산신령은 호사가라 자던 학 놀래 깨워
무단한 솔 이슬이 얼굴에 떨어져 차갑네
만월담은 6곡인 옥류동에서 한참 떨어진 김천 증산면 평촌리에 있었어요. 청암사와 장뜰 마을을 지나 수도암 쪽으로 한 100m쯤 올라가면 오른쪽에 있답니다. 여긴 자칫하면 놓치고 지나갈 수 있으니 잘 살피면서 올라가야 해요. 우리도 얼마쯤 지나쳤다가 다시 내려와서 찾았답니다.
장뜰 마을을 벗어나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좁은 길이 있는데 들머리에 '만을담 굿당'이라고 쓴 알림판이 있어요.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소나무 여섯 그루가 아주 멋진 모습으로 서있답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흘구곡을 알리는 알림판이 따로 없어요. 나중에 들었지만, 태풍 '매미' 때문에 모두 휩쓸려갔다고 합니다. 그 때문인지 만월담 둘레에는 물난리 때 떠내려 온 큰 돌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지요.
소나무 여섯 그루와 바위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뽐내고 있는데, 지금까지 본 다른 무흘구곡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어요. 만월담 풍경에 흠뻑 빠져 소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이슬에 놀란 선생처럼 우리도 한참 동안 이 풍경에 취하였지요. 한 가지 아쉬운 건, 소나무, 바위와 함께 물이 더욱 많이 흐르면 좋을 텐데….
8곡 - 옥룡암여덟 구비 가슴을 여니 눈앞에 활짝 열리고
냇물은 흘러가는 듯 다시금 맴돌고
자욱한 구름 꽃과 새는 혼연히 어울려서
유람객 오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누나.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은 매우 힘이 들었어요. 오늘 가야할 곳은 무흘구곡 아홉 번째까지 보고 1050m 수도암까지 올라가야하는데, 끝까지 오르막길이에요. 그나마 우리는 자전거라도 타고 가지, 그 옛날 한강 선생은 오로지 걸어서 올랐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르막길뿐 아니었어요. 오른쪽, 왼쪽 아무리 살피며 올라가도 도무지 '옥룡암'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미리 알아본 걸로는 아까 본 '만월담'에서 1.4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는데, 또 바위 생김새가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해서 '와룡암'이라고도 한다는데…. 엇비슷하게 보이는 바위는 많고 많은데 딱 맞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올라가면서 바위 사진을 여러 장 찍었는데 그 가운데 있을까? 어쨌거나 이 멋진 곳에 '알림판' 하나 제대로 세우지 않았으니 참 답답했답니다.
9곡 - 용소폭포아홉 구비 머리 돌려 다시금 한숨 쉬나니
내 마음 산천이 좋아 이러함이 아니로다
근원은 본디부터 말로 못할 묘함이 있나니
이곳을 버려두고 다른 세상 물어야만 하나?
이제 드디어 무흘구곡 아홉 번째! 마지막 풍경을 찾아갑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이 길을 오르내리던 차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우리를 보면서 흠칫 놀라기도 하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참 동안 보고 가는 이들도 있어요. 그만큼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따라 높은 곳까지 올라왔답니다.
찻길 곁에 따로 갓길을 내어 난간까지 만들어둔 게 보였어요. 내려서 다가가니 맞았어요. 이곳이 바로 '용소폭포'랍니다. 시원한 물줄기를 힘차게 내리꽂으며 떨어지는데, 그 아래로 작은 못을 이루고 있어요. 이 못에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얘기가 이어져 내려온답니다.
한강 선생은 아홉 구비를 다 돌아본 뒤, 한숨을 쉬었다는데 왜 그랬을까? 대가천 맑은 물과 어우러진 빼어난 풍경을 노래하며 시를 썼던 선생, 문득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남겨둔 채, 또 다른 세상으로 돌아 가야하는 걸 안타까워한 건 아닐까?
이틀 동안 자전거를 타고 성주와 김천을 오가며 대가천을 따라 무흘구곡 아홉 곳을 모두 돌아봤어요. 맞바람도 오르막길도 마다않고 싸우며(?) 선생의 발자취를 쫓아다녔지요. 가까운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시와 딱 어울리는 풍경들이 더욱 놀랍네요.
다 둘러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남편이 얘기합니다.
"아쉽다"
"… 뭐가?"
"아홉 곡인데… 하나만 더 하면 열 개잖아."
"…?"
"이틀 동안 자전거로 다녔는데, 우리도 거기 풍경이 되지 않을까?"
"그게 뭔 소리야…"
"우리도 저 바위 옆에 서있으면 풍경이 되겠지! 그럼 딱 열개 되겠는데."
"그럼… 무흘십곡?"
"응, 무흘십곡!"
"하하하."우리는 서로 '무흘십곡'이 된 채 구미로 돌아옵니다. 등 뒤로 넘어가는 오후 늦은 햇살은 무흘십곡이 된 두 사람을 비춰 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