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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나무가 없는 산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없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있으나 아이들이 없는.
나무나무가 없는 산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없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있으나 아이들이 없는. ⓒ 안준철

 

자연! 자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자연은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그 무엇이지요. 그런 범상치 않은 아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어서 저는 자연이의 이름을 부를 때만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창밖의 자연을 바라보곤 합니다. 마치 연극 대사라도 외우듯 창문을 열고 "자연아!"하고 크게 부르면 대답 없는 자연 대신 교실 안에 있는 자연이가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곤 하지요.

 

자연이는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푸르른 자연 만큼이나 싱싱함이 느껴지는 아이입니다. 그런 딸이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아이인데, 가끔 수업시간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입니다. 그러다보니 수업시간에 아이의 이름을 자주 부르게 되고, 그것이 교사인 저나 아이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가 될 수 있겠다 싶어 가끔씩 창밖의 자연을 큰소리로 불러보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꾀를 써서라도 아이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싶은 것이 제 마음이지만, 가끔은 아이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따끔하게 혼을 내줄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몇 번 돌이킬 기회를 주어도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할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지요. 다행히도 자연이는 마지막 순간에 저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거짓말한 것을 시인했지만,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거북해진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꽃(얼레지) 교육의 꽃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넉넉한 기다림 속에서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꽃(얼레지)교육의 꽃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넉넉한 기다림 속에서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 안준철

 

자연이는 방과후에 하는 영어 수업을 자주 빼먹곤 했습니다. 방과후 수업을 받고 싶은 아이들만 받도록 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터이니 자연이의 잘못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수업을 맡고 있는 저로서는 아이를 그냥 내버려둘 수만도 없어서 수업을 빼먹을 때마다 찾아가 말로 타이르며 지도를 하곤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따져보면 별것이 아닌 일이지만 학교에서는 이런 별것이 아닌 일로 아이들과 신경전을 벌일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도 아이들과 나눌 얘기가 무궁무진한데 말입니다. 하루는 영 마음이 편치가 않아 복도를 서성이다가 자연이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널 혼내려고 온 게 아니야. 사실은 사과하고 싶어서 온 거야. 선생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요즘 내가 너한테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것 같아서 말이야. 방과후 수업 빼먹은 것도 그렇지만 수업시간에 자주 딴 생각하는 거,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울 때가 있어. 널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 않겠지. 그래도 미안하다."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며칠 뒤, 저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이의 나이가 무려 700만 17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믿기 어려운 말을 내게 해준 이는 평소에도 저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동료 시인입니다. 아니,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동료 시인이 소개해준 분석심리학의 대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입니다. 


진화와 유전이 신체의 청사진을 제공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정신도 인류 초기 발달 단계부터 정신의 청사진을 제공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칼 융이 처음 발설한 '집합 무의식' 개념입니다. 집합 무의식은 프로이드가 천착했던 '개인 무의식'과 대별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개인 무의식이란 자아에게 인정받지 못한 경험으로 프로이드는 이 무의식의 범주를 어릴 적 해소되지 못한 욕구에 한정시키지만, 칼 융은 인간의 마음(무의식)이 개인의 과거뿐만 아니라 인류의 과거, 심지어는 생물진화의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합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침팬지와 유전적 분리를 한 시기를 약 700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 열일곱 살인 자연이의 나이를 700만 17살로 계산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지요. 물론 진화론은 하나의 가설이고, 더욱이 저는 진화론 추종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인류의 시작이 언제이든 그것이 꽤 오래된 과거임에는 분명합니다.


아이들  아이들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존재만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아이들은 바로 지금 행복할 권리가 있다.
아이들 아이들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존재만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아이들은 바로 지금 행복할 권리가 있다. ⓒ 안준철

 

그런데 왜 갑자기 자연이의 나이를 들먹이게 된 걸까요? 저를 포함한 우리 교사들은 아이들을 너무 쉽게 판단해버리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해서입니다. 인격적으로 대해주면 머리 꼭대기에 앉을 거라는 생각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아이를 경험해보지도 않고 그런 확신을 갖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지요. 한두 번의 경험만으로 아이를 쉽게 판단하는 것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려 700만 17살인 한 존재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릴 적부터 모순투성이의 세상에 의문을 품어온 동료 시인은 칼 융의 집합 무의식을 만났을 때 많은 의문이 풀렸다고 했습니다. 한국작가회의 순천지부가 해마다 주관하는 <문예아카데미>에 세 번째 강사로 나와 강의를 하던 자리였습니다. 강사 이민숙 시인은 제가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평생 간직해야할 중요한 말을 제 가슴언저리에 떨어뜨려주었습니다.


"칼 융의 심리학을 접한 뒤로는 무엇에 대하여 모른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류의 먼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복잡하고 오묘한 경험체계를 가진 한 인간을 나는 모를 수밖에 없었고, 몰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사람을 모르기 때문에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었어요. 몰라도 되는 위안이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제가 자연이를 찾아가 사과를 한 것도 자연이를 잘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에 멍하게 앉아 있는 아이니 생각도 없을 거라고 쉽게 단정해버렸다면 그날 아이를 찾아가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비록 공부에 마음을 다 쏟지는 못하고 있지만 자연을 닮은 싱싱하고 귀여운 아이와 뜨거운 눈빛을 나누지도 못했을 테고요. 말을 하다 보니 자연이가 무척 보고 싶습니다. 내일 학교 가면 교실 창문을 활짝 열고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자연아, 너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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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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