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서 없던 습관이 새롭게 생겼다. 학교 사무실에 앉으면 컴퓨터를 켜기가 무섭게 검색창에 '환율'이라고 쳐 넣는다. 전에도 몇번 했던 일이지만 요즘처럼 내 마음을 짓누른 적은 없다. 고등학생 시절 마음 졸이며 모의고사 시험 결과를 펼쳐보는 것만큼이나 초조하다.
영국 유학생인 내가 환율을 검색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환율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시점을 '딱' 잡아서, 한국 통장의 돈을 영국은행으로 바로 송금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환율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외국에서 돈 아끼며 어렵게 '고학'하는 유학생들의 주름이 늘고 있다. 봄 학기가 시작한 지 몇 주나 지났지만, '환율 눈치' 보느라 아직도 학비를 내지 못하는 등 환율이 아주 골칫거리다. 요크대 정책학과 서형욱(29)씨는 "환율이 떨어지면 학비를 내야겠다고 하다가 타이밍을 못 잡아서 학비 낼 때가 지났다"며 "환율이 IMF 환란 때 수준으로까지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영국 경제 안 좋은데 왜 원화 가치가 급락할까영국 파운드는 영국의 높은 물가만큼이나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돈 중의 하나다. 그래서일까. 파운드는 지난 4월 9일 종가 기준으로 1파운드당 2041원(기준환율)을 기록했다. 지난해에 비해서 무려 204원이나 올랐다.
같은 날 미국 달러가 1044원(기준환율)으로 지난해에 비해 121원이 올랐다고 난리지만, 파운드는 달러에 비해 거의 두 배나 오른 셈이다. 강한 파운드만큼이나 상승 폭도 큰 것일까. 달러가 10% 정도 오른 것처럼 파운드도 약 10% 올랐지만, 같은 10%라고 해도 상승가격 자체가 워낙 커서 그 느낌이 다르다.
내심 '올라가면 떨어지는 날도 있겠지' 기대하지만, 혹시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한 달여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생활비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왠지 한두 달 후에도 이런 기조가 크게 변동되지는 않을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환율이 2000원대 초반일 때라도 "왜 바로 송금하지 않았느냐"는 아내의 추궁(?) 아닌 추궁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파운드가 요동친 것은 그렇게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불과 지난 2월 말만 해도 파운드는 언제나 그렇듯이 1800~1900원대 사이에서 아주 '평화롭게' 움직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3월초부터 환율이 상승하기 시작하더니만 하루에 무려 47원이나 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더니만 아예 2000원대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고 있다.
왜 하필 3월부터 이렇게 환율이 요동치는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름 분석해본 결과, 2월말에 새로 들어선 이명박 정부의 환율 정책이 의심스러워졌다.
환율은 기본적으로 두 나라 사이의 경제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수많은 변수들이 개입한다. 파운드화가 원화에 대해 갑작스레 강세를 보일 수 있는 경우로 우선 영국 경제 상황이 한국의 그것보다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은 결코 아니다.
최근 영국 경제도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충격 등으로 인해서 영국의 집값이 크게 떨어지면서 은행에서 담보대출을 받은 사람들이 대거 집을 압수당하는 등 내수가 악화되고 있다. 지난 1/4분기 성장률도 0.4%로 기대치를 훨씬 밑돌았다. <BBC>는 11일 "'내년 말까지 경기침체가 지속될 것'이라며 정부가 경기침체를 막을 수 있는 금리인하 등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영국상공회의소에서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원인은 이명박 정부의 인위적 고환율 정책 이처럼 영국 경기가 급강하하는데도 파운드화에 대한 원화 가치가 급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최근의 고유가와 재정수지 악화 등 수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이명박 정부의 외환정책은 무시 못할 중요 변수가 아닐까 싶다.
사실 환율이 하루에 수십 원을 급등락하는 '널뛰기' 장세를 연출하면, 정부는 구두개입 등의 방식으로 외환시장에 강력히 개입, 환율이 안정적으로 변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정석이다. 환율이 비정상적으로 급상승할 경우에는 외환보유고 등을 동원해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등 정부는 결코 무시 못할 외환 시장의 '큰 손'이다.
그런데 환율이 폭등하는데도 우리 정부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기획재정부의 강만수 장관과 관료들은 '환율이 더 상승해야 한다'며, 적정 환율로 하락을 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과도한 환율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한국 기업의 수출 제품 가격을 낮추고 수출을 늘려 성장률을 높이겠다는 심산이다. 일부 기업에게만 유리한 이러한 고환율(원화 가치 하락) 정책 때문에 한국 내 물가가 더 상승하는 것은 물론 기러기아빠들이 괴롭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들이 많지만, 유학생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환율 상승으로 가뜩이나 주머니 사정이 불안한데, 며칠 전에 한국장에 쌀을 사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1포대(9.06㎏)에 11파운드 하던 쌀이 어느새 15파운드로 껑충 뛰었다. 식량난의 여파가 이 곳에까지 미친 것이다.
동양 음식을 파는 한국인 주인아저씨는 "쌀값이 뛴다는 소문을 듣고 중국인들이 대거 사재기를 해두고 있다"고 설명해줬다. 영국의 그 많은 중국 사람들이 사재기를 한다면 시장에 끼치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영국 집값이 떨어지고 있다지만 매년 오르는 기숙사 월세는 도무지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인다. 환율 상승으로 주머니는 가벼워지는데 쌀값에 집세에 '첩첩산중'이다. 출산이 성큼 다가온 아내의 몸이 부쩍 무거워지면서, 내 마음도 묵직해진다. 아무래도 파운드를 벌기 위해서 더욱더 열심히 뛰는 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다. 그에 앞서, 한국 정부에 부탁드리고 싶다.
"경제 성장도 좋지만, 제발 환율 상승 조장하지 말고 있던 그대로 좀 두세요. 무심코 던진 돌에 애꿎은 유학생들 허리 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