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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편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편지. ⓒ 장정희
 
내일은 스승의 날이다. 교단 생활 24년. 스승의 날이 올 때마다 나는 늘 부끄럽고 계면쩍은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전쟁터 같은 입시의 한 중심에서 아이들의 고통과 모순을 줄이는데 앞장 서기는커녕, 체제 순응을 위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닥달하고 있는 듯한 무기력함 때문이다.
 
예의와 염치는 커녕 오로지 공부만 잘하는 아이들이 대접받는 사회,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길 밖에 없다는 이념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일이 전부가 되어버린 지금의 교육 현장은 교사인 내게도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오늘 아침, 출근하자마자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편지를 발견했다. 중간고사 준비에 밤잠 못잤을 원희가 언제 이런 편지를 썼을까. 편지를 읽는 동안, 가슴 속으로 따뜻한 기운이 소리없이 번져가고 있다.  

 

선생님!

 

다시 촉촉한 봄비가 내렸어요. 감사와 은혜의 달, 5월에 말이에요. 지난 번 봄비가 어린 새싹들을 틔워내기 위한 비였다면, 엊그제 내린 비는 메마른 대지에 발버둥을 치고 있을 연초록 새싹들에게 예쁜 꽃등불을 매달아주는 사랑의 손길 같은 거였어요. 촉촉한 봄비에 망울망울 피어난 꽃들을 보니 꼭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꽃 같은 희망, 산 같은 용기, 하늘같은 사랑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덧 2학년이 된 지금, 저는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스승의 날을 맞아 그동안 꼭 쓰고 싶었던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답니다. 이렇듯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5월은 참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한 지난 1년을 떠올려보고 있어요. 함께 울고 웃었던 1년이기에 더욱 그리워지는 것 같아요. 추운 날씨만큼이나 떨리고 긴장된 마음으로 학교를 배정 받고 처음 교정에 들어서던 입학식 날, 잘해보겠다는 각오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제 마음은 무척 어지러웠던 게 기억이 나요. 혼자서 낯선 여행을 해야 하는 것처럼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두려웠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입학식 날 만난 선생님의 봄날만큼 따스한 미소는 그간의 제 걱정을 한꺼번에 날려버렸답니다.

 

저희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선생님은 따뜻한 마음으로 두려움으로 가득한 저희들을 편안하게 이끌어 주셨지요.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 학교생활에 부족한 부분이 있지는 않은지 세심히 챙겨주시고, 친구들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활기찬 학급 분위기를 만들어주셨지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고등학생이 됐다는 설렘만 안고 입학하여 너무도 힘들어하던 저희들에게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을 거쳐 간 많은 선배들의 이야기로 격려해주셨던 선생님.

 

이런저런 말씀 끝이면 늘 선생님께서는 혼자만 이기려는 마음보다는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는 삶이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는 것을 덧붙이셨지요. 정작 우리가 싸워야 할 경쟁자는 친구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셨어요. 이러한 자신과의 싸움은 대학 입시 뿐만 아니라, 거칠고 험한 인생을 건너가는데 꼭 필요한 힘이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고요.

 

그때의 일들이 저희들에겐 얼마나 큰 응원으로 다가왔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가끔씩은 너무도 힘들고 지쳐서 짜증이 날 때, 괜히 선생님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요. 저희들 곁에 선생님 같이 든든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에요.

 

선생님!

 

지금 이렇게 펜을 들고 있는 이 시간에도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묻어나는 것을 느껴요. 표현할 수 없는 크나큰 고마움과 사랑을 한 아름 안겨드리고 싶은 5월, 제 편지를 읽으실 선생님의 얼굴에 하나 가득 떠오를 미소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고 있어요. 소중한 제 마음을 담아서 말이에요. 1년 동안 저희에게 쏟아 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크셨던가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고요.

 

앞으로 저희들이 나아갈 복잡한 사회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저희들의 키에 맞추어 따스한 온기를 베푸셨던 선생님의 은혜는 하늘도 흉내 낼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일 거라고 생각해요. 살아가면서도 선생님과의 인연, 추억만은 절대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그것이 제가 용기 있게 살아갈 힘이 되는 까닭이에요.

 

선생님!

 

저희가 마음껏 걸었던 잔디밭과 열심히 공부하고 가꿨던 이 학교를 떠나도 선생님은 항상 이 자리에 변함없이 인자한 모습으로 후배들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겠지요? 저희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까지 선생님의 제자로서 선생님을 존경할 거예요.

 

스승의 날을 맞아 평소에는 미처 말로 다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은혜에 다시 감사드리며 제 마음을 한아름 담아 선생님께 보내 드립니다. 선생님, 꼭 행복하셔야 해요~~ 

 

2008년 5월 14일 

2학년 3반 정원희 드림.

 

원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허리에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가는 아이다.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탓이다. 그런데도 낙관적인 태도와 밝은 표정이 아이를 활기차게 만든다. 아니, 그런 힘이 아이의 일상을 환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대견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이의 편지는 상처받고 널브러진 못난 선생을 일으켜 세우는 따뜻한 손이다. 일어나 선생인 나로 하여금 다시 아이들에게 손을 건네게 만든다. 이렇듯 우리는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손에 손을 잡고 갈 길을 간다. 막는 것 산이거든 부수고 못 가랴.

덧붙이는 글 | 제가 있는 학교에서는 내일 아침, 교내방송에서 이 학생이 직접 편지를 읽을 수 있게 채택되었습니다. 저희 학교 선생님 전부가 같이 들을 내용인 만큼 모든 선생님들에게 드려도 되겠다 싶어 올린 것입니다. 


#스승의 날#교육#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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