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들은 나가라. 우리가 싸울 테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윤상원 평전, p406 中)27일 새벽, 계엄군이 도청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윤상원 열사가 어린 고등학생들에게 외친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다'라며 자신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다행히도 80년 5월 27일 광주에서 생존한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은 역사의 증인들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해야 할 사람이 되었다. 과연 산자들은 5·18광주민주항쟁과 윤상원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강풀의 <26년>과 <화려한 휴가>2000년대 두 개의 미디어가 광주를 되살렸다. 강풀의 만화 <26년>과 영화 <화려한 휴가>였다.
강풀의 <26년>은 광주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광주의 원흉 전두환과 부모를 잃은 사람, 계엄군, 계엄군의 아들로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와 세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사람들이, 복수와 용서라는 현재적 문제로 5·18을 기억한다.
반면 <화려한 휴가>는 영웅의 탄생과 영웅과의 러브스토리라는 다소 상업적인 요소를 통해 광주 5·18민중항쟁을 대중들에게 선물한다. 박흥수(안성기)라는 예비역 군인은 침착함과 단호함을 가진 영웅으로, 강민우(김상경)는 동생의 죽음 때문에, 죽음을 무릅쓴 투사로 변화는 영웅으로 만든다. 그리고 박신애(이요원)과 강민우의 사랑을 그림으로써 약간의 재미를 더한다.
이같은 <화려한 휴가>의 영웅들은, 침착함과 단호함을 가지고 시민군들을 진두지휘했던 윤상원과 인간적인 모습을 가졌던 윤상원을 보여준다. 윤상원뿐만 아니라 상황 실장을 맡으며 시민군들을 담당했던 박남선과 같은 인물과 가족을 잃어 투쟁했던 실제 역사에서의 평범한 광주 시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 박신애와 강민우의 사랑은, 윤상원에게 들불야학을 제안하며 치열하게 노동운동을 하다 산화해간 박기순 열사와 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으로 상징되는 윤상원의 역사적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박신애(이요원)는 방송차를 타고 돌아다니면 투쟁을 호소했던 전옥주라는 실제역사에서 존재했던 인물을 함께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화려한 휴가>는 이 세 영웅을 통해 5·18 광주 민중항쟁의 실제 역사를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윤상원은 영웅이 되고자 하지 않았다그러나 실제 윤상원의 삶은 어떠했을까? <윤상원 평전>에서의 윤상원은 고등학교 때 방황을 하다가 재수를 하여 겨우 전남대를 입학한 지극히 평범한 학생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족의 부양과 사회운동이라는 그 시대 청년들과, 오늘날의 운동권대학생이면 누구나 했을 법한 고민을 하는, 연극과 노래 가락이 구수했던 재주 많고 인기 많았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박기순과 김상윤을 만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되고, 이태복을 만나면서 변혁운동을 꿈꾸는 전민학련의 중앙위원이 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윤상원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자신이 대중들의 영웅이 되어 실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스스로 은행이라는 좋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들불야학이라는 가장 낮은 곳에서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다. 그리고 군부의 총칼에도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총을 들려는 광주시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그들을 지지하고 함께 싸우고 했다.
윤상원은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는 것은 '그동안 죽어간 광주시민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라고 종종 이야기하였다. 그에게는 계엄군에 맞서 싸운 평범한 시민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영웅이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가 기려야 할 영웅이다. 윤상원 평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과 윤상원 열사의 삶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화려한 휴가>는 우리에게 미국산 쇠고기와 같은 존재이다. SRM물질 모두 제거하고 20개월 미만의 제대로 된 검역을 받은 고기가 들어온다면, 우리에게 싸고 좋은 고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역사적 광우병을 안겨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박기순 열사와 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에서 불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라는 가사가 있다. 그러나 '앞서서 나가니'가 아니라 '앞서서 가나니'가 맞는 표현이다.
윤상원과 그의 동지들이 선택한 것은 산자들 보다 먼저 간,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산자들이여 이미 간 사람들을 제대로 따르길 원한다면, 제대로 기억하길 원한다면 윤상원 평전을 읽자.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해 오늘날의 현실을 반추해보자. 산자여 따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