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사는 것과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은 삶일지라도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때로 '죽는 것보다 힘든 삶'도 있다. 지금도 우리와 엄연히 같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구 한편에서는, 삶은 고사하고 자신의 생과 사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여인네들의 한과 모진 삶의 풍경을 담아낸 이야기는 예부터 우리 나라에도 지겹도록 많이 있었다. 자칫 신파조나 넋두리로 흐르기 쉬운 이야기는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는 지루하고 시대착오적인 옛날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 한편에서는 이러한 부조리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그저 일상 속의 소박한 행복을 꿈꾸던 여인들의 비극적인 스토리는 시대와 문화, 공간을 넘어 '여인 혹은 인간의 이야기'라는 강력한 공감대로 이어진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그저 여성의 사연이기에 앞서 '삶에 대한 예의'나 '인간에 대한 존엄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도 국가와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평범한 사회적 약자들이 남성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집단의 횡포와 부조리에 의하여 유린당하는 모습은 성별을 떠나 안타까움과 연민을 자아낸다.
위정자들의 탐욕과 정치적 분쟁이 벌어지는 곳에는 언제나 고통받는 민초들이 있었고, 비록 시대와 문화는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우리와 똑같이, 작은 행복을 갈망하던 평범한 인간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그리 멀지않은 과거에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군사정권의 폭압으로 이어지는 굴곡의 현대사를 체험한 바 있는 우리들의 또다른 자화상일수도 있다.
여기서 호세이니의 소설이 주는 진정한 울림은, 바로 거대한 사회구조와 시대의 풍랑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짓밟히는 비극을 보여주는 데 있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의지를 박탈당하는 사회적 모순 앞에서 <천개의 찬란한 태양> 속 주인공들의 험난한 투쟁은 '인간vs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를 넘어서, 본질적으로 '사회vs인간'의 부조화에서 오는 '시대가 잉태한 비극'이라는 데 슬픔이 있다.
작품에서 두 여인을 핍박하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는 남편 라시드의 횡포는 작게 보면 개인의 인격적 결함이다. 그러나 남편의 폭력보다 더욱 무서운 공포은, 잘못된 현실을 알면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그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다는 시대적 모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전쟁과 기아, 폭력이 끊이지 않는 현세의 지옥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수대에 걸쳐 겹겹이 누적된 한의 무게와 비례한다.
그녀들이 꿈꾸는 '천개의 찬란한 태양'은 어쩌면 참혹한 현실에 대한 도피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끝에서 또 한 번 구원의 희망을 건져올리려는 여성(민초들)들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남자들로부터도 시대로부터도 외면받은 여인네들의 한은 운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이야기하기도 힘들 만큼 고통스럽고,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그리는 마음만큼이나 기나긴 시대의 어둠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역시 멀지 않은 과거에, 그리도 어쩌면 지금도 굴곡의 시대를 헤쳐오고 있다. 단순히 아프가니스탄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는 기쁨을 넘어, 진정 깨달아야 할 것은 '삶을 대하는 진정성'에 있다.
불행한 시대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시련을 감수해야하는 마리암과 라일라의 여정에서 어쩌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전쟁통에 내던져진 가난한 민초이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중환자이건, 절망의 끝을 체험해본 사람들일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살아갈 수 있다는 의지야 말로 죽는다는 것보다 더 비장하고 치열한 '삶에 대한 예의'를 보여준다.
투사도 선각자도 아닌 평범한 그녀들의 눈물이 시대와 문화적 격차를 넘어 많은 이들의 가슴을 흥건하게 적시는 이유는, 그들의 이름이, 국적이 무엇이든 간에 궁극적으로 우리와 똑같은 행복을 꿈꾸는 인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온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 혼을 불사르는 것보다 더 길고 험난한 삶의 고통을 아는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처연한 그 미소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여인들은 우리네 어머니들의 또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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