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에서는 해마다 진주 논개제가 개최됩니다. 지난 23일부터 25일까지 열린 7회째를 맞이하는 진주 논개제에는 의암별제와 함께 논개 투신 재현행사를 위시해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습니다. 의암별제는 조선 고종때 진주목사를 지냈던 정현석이 의기사를 중건하면서 매년 6월중 길일을 택해 논개에 대한 제향을 올리게 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
논개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의암별제와 함께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는 투신재현행사도 같이 열렸습니다. 특히 올해는 그동안 친일화가가 그렸고 복식이 맞지않는다는 논란속에서 논개의 표준영정이 봉안식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논개는 2차 진주성싸움의 승전잔치 때 진주성 촉석루 아래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해 순절한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전북 장수 출신으로 이름은 주 논개이며, 숙부의 농간으로 논개가 민며느리로 팔려가자 논개의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야음을 틈타 경상도로 도주하게 됩니다.
결국 다시 잡혀온 모녀는 당시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의 심문을 받게 되고, 결국 무죄를 입증받아 내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 수 있도록 배려를 받게 됩니다. 후에 최경회 부인의 추천으로 부실이 된 논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경회를 따라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했고, 최경회가 2차 진주성싸움에서 남강에 투신해 순절하자 왜군의 승전잔치도중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게 됩니다.
논개의 순국은 임진왜란이후 알려지지 않다가 1620년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채록되어 나타나기 시작했고, 조선 경종 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논개에 대한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여 순국을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 후 조선 영조 때인 1740년 경사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의기사와 의암사적비가 건립되었고, 진주의 선비였던 정대륭은 논개가 투신한 바위에 '의로운 바위'라는 의미의 '의암'이란 글자를 새기게 됩니다.
의암사적비에는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으롭다는 소리를 들었으리요 /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파죽지세로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던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2개월만에 평양성까지 함락시켰습니다. 명나라의 원군 파병과 조선의 전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피나는 활약으로 왜군은 장기전에 돌입할 요량으로 진주성을 함락하고,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을 선점하려 했습니다. 진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3만명의 왜군은 진주성을 포위하고 금새라도 함락시킬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진주성 내에는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과 민관군 합쳐 3,800여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김시민 장군의 뛰어난 전력, 죽기로 싸운 진주성내의 민관군과 난공불락의 천혜적 요인을 갖춘 진주성, 승자총통,현자총통,비격진천뢰 등의 무기들, 그리고, 진주성 주변에서 도운 의병들의 게릴라 전술 등이 어울어진 뛰어난 승리였습니다. 그 이름하여 진주대첩.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인 행주대첩,한산도대첩과 함께 3대 대첩으로 진주처럼 영롱한 승리의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3만의 정예부대로도 패한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이듬해인 1593년 6월 다시 10만의 정예군을 보내 한 사람도 남기지말고 도륙하고, 김시민의 목을 가져오라는 명령하게 됩니다. 왜군의 한반도 진출 이후 최고의 참패를 당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싸움의 패배가 크나 큰 노이로제였던 것 같습니다. 진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한반도 출병의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가 출전했던 만큼 진주성 함락에 왜군의 주 전력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진주성 내에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은 이미 진주대첩때 입은 부상으로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진주성 내에는 김천일, 최경회 등 전라도 출신의 의병장들과 6만이 넘는 관민이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은 함락되고, 진주성 내에 있던 6만여 명의 사람들은 왜군들의 칼날아래 모두 목숨을 잃게 됩니다.
논개는 2차 진주성 싸움 때 남강에 투신해 순절한 최경회의 소실이었습니다. 진주성을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라는 최경회의 말을 따랐고, 후에 최경회가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장한 결의를 하게됩니다.
논개는 왜군이 촉석루에서 진주관기를 불러놓고 전승을 기념하는 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팔아 옷과 가락지 등을 준비했습니다. 승전잔치가 있던 날, 관기들을 따라가다 촉석루 아래 강가로 내려가 왜장을 유인했고,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해 순절하게됩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아리땁던 그 아미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 속 같은 입술죽음을 입맞추었네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그대의 꽃다운 혼어이 아니 붉으랴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수주 변영로 선생의 '논개'
2차 진주성싸움을 시작으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는 장면에 이어 진주성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6만여 민관군의 원혼을 위로하는 진혼무를 따라 촉석루로 오르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논개의 남강 투신 재현행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차디찬 남강으로 떨어지는 장면도 극적이지만, 치열한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6만여 군관민의 원혼을 위로하고 모셔가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400여년 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늦은 밤 남강의 차디찬 물길에 빠지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분들에게 쏟아지는 박수소리 위로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됐습니다.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처럼 수상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불꽃의 향연은 400여년 전의 원혼을 위로라도 하듯이 밤하늘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