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통신위원회의 모델인 미 연방통신위원회(FCC) 현 위원장인 케빈 마틴(Kevin Jeffrey Martin, 42)이 사면초가에 빠졌다.
그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신문-방송 겸업 허용이 미 국회에서 제지를 당했다.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협의체 기구임에도 다른 위원 위에 군림하려 한다는 '권력 남용' 혐의까지 받고 있다. 게다가 미디어 경험이 전혀 없던 변호사 출신 FCC 위원장으로서 무능력하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세금 감면, 규제 완화 등 모든 부분에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부시 정권에 가장 충실하던 그로서는 '대략난감'이 아닐 수 없다. 2000년 대선 당시 부시의 플로리다주 '보조개표' 승리에 관련되면서 2005년 40세에 일약 FCC 위원장이 될 때부터 마틴은 '부시의 푸들'로 불렸다.
그가 5년 임기를 채울 가능성은 희박하다. 올 대선에서 민주당 대통령이 탄생할 경우는 물론, 공화당 맥케인이 대통령이 돼도 마틴은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 부시와 달리 맥케인은 '애견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하 양원, '신문-방송 겸업 허용' FCC 결정 제지
지난 16일 미 상원은 한 언론사가 특정 지역에서 신문사와 방송국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을 허용하는 FCC 결정을 뒤엎었다. FCC는 작년 12월 2명의 민주당 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케빈 마틴을 포함, 3명의 공화당 위원이 찬성하면서 신문-방송 겸업을 허용하는 결정을 했다.
FCC의 결정은 곧바로 미디어 시장에 영향을 끼쳤다.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은 FCC의 결정이 있은 지 채 4개월이 지나지 않은 지난 4월 뉴욕 지역 시장 점유율 3위 신문인 <뉴스데이>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과 같은 신문은 물론 방송사 2개를 이미 소유하고 있는 머독의 결정은 FCC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었던 듯 했다.
하지만 이날 상원의 반대로 FCC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상원 투표를 주도한 바이런 도르간 의원은 "FCC의 결정은 미 전역에서 신문-방송의 대규모 합병을 방관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반대 이유를 밝혔다.
미 하원도 부시 대통령의 거부권 시사에도 불구하고 상원과 비슷한 결정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미 국회는 FCC의 결정을 뒤엎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케빈 마틴의 '권력 남용'을 감시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말 "마틴이 신문-방송 겸업 허용 주장을 다른 FCC 위원들한테 강요하고 있다"며 "마틴은 이를 위해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위원회의 연구 결과를 다른 위원들한테 제대로 알리지 않는 방법 등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어 FCC의 활동을 모니터하는 하원 상공에너지위원회 직원들이 존 딩겔 위원장에게 보낸 비밀 메모 내용을 소개했다. 이 메모에는 "FCC의 (의사 결정) 과정이 상당히 침해됐으며 이는 근본적으로 위원장인 마틴의 탓이 크다"고 쓰여 있다. 이에 따라 이 신문은 조만간 마틴에 대한 하원 청문회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케빈 마틴은 FCC 투명성에 먹칠"
마틴에 대한 의회의 의심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말에도 마틴은 하원 상공에너지위원회로부터 경고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에서 존 딩겔 위원장은 "(마틴이 위원장이 된 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FCC가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적절한 처신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신뢰를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딩겔은 마틴이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하기 전에 모든 자료를 공개하는 데 소홀히 했다고 꼬집었다. 딩겔은 이어 마틴이 FCC 자체 조사 결과가 외부 조사 결과와 상충하면 자신의 의견에 맞는 외부 조사 결과만 신뢰해 편향된 결정을 내려왔다고 덧붙였다.
FCC의 민주당 위원인 조나단 아델스타인은 "마틴이 회의 전날 밤에야 회의 관련 자료를 다른 위원들에게 공개해 이 위원들이 마틴의 주장을 검토할 시간을 거의 주지 않았다"고 딩겔을 거들었다.
마틴은 시민단체의 거센 비판에도 직면하고 있다. 신문-방송 겸업 허용이 낳을 '빅 미디어'출현과 그로 인한 미디어 다양성 훼손을 막기 위해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마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프리 프레스'의 정책 의장 벤 스캇은 "마틴은 (공화당의 정책대로) 이미 결정된 결과를 형식적으로 승인 받으려는 부정직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FCC가 이런 식으로 투명성을 잃어간다면 대중은 위원회의 어떤 다른 결정에도 신뢰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40세에 일약 FCC 위원장, 부시의 '예스맨'이 비결
케빈 마틴은 40세이던 2005년 부시 대통령에 의해 FCC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이전까지 마틴은 미디어 관련 일을 전혀 해 보지 않았다. 그가 '제4의 권력'이라는 언론과 관련된 행정, 준입법, 준사법권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FCC 위원장이 된 것은 전적으로 우연에 가까웠다.
로스쿨을 졸업한 직후 마틴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시의 연방법원 판사 보조원으로 일하게 된다. 2000년 미 대선이 플로리다주의 '보조개표'에 대한 법원 결정으로 승부가 갈리게 되자 마틴은 재빨리 부시 진영에 참가해 신임을 얻게 된다.
부시의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1년 36세의 나이로 FCC 위원이 되고 결국 4년 뒤 위원장까지 된다. 매파의 공격을 받던 콜린 파월 전 국무부 장관과 함께 FCC 위원장이던 그의 아들 마이클 파월도 부시가 몰아내면서 마틴이 그 뒤를 이은 것. 마틴에 대한 부시의 각별한 애정을 보여준 대목이었다.
아무런 전문 지식 없이 FCC 위원장이 된 마틴은 부시의 정책을 추진하는 '예스맨'에 불과했다. 부시의 무조건적인 시장 친화적 정책은 마틴에 의해 미디어 산업에도 적용됐다. 그는 신문-방송 겸업을 허용하는 FCC 결정을 이끌어냈지만 이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고 의회의 제지를 받게 됐다. 의회는 그가 미국 언론 정책의 근간으로서 언론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공정성의 원칙(Fairness Doctrine)'에 대해 무지했다고 비판했다.
부시의 관심사항 외에 다른 FCC 정책에 관해서는 마틴은 무능력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FCC는 자연재해와 테러 등 비상사태에 대비, 긴급 연락망 구축을 위해 700MHz D블록 주파수를 민간에 판매하려는 시도를 여러 해 동안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올 3월 또 다시 경매가 유찰되면서 마틴의 능력이 의심받고 있다.
미국 위성 라디오 산업의 양대 주자인 XM과 사이러스의 합병 문제에 대해서도 마틴은 명확한 견해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2009년 미 전역에서 시작되는 디지털TV 방송과 관련한 준비에도 소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번역 실수하는 한국 정부, FCC도 잘못 베낀 듯
이명박 정부는 세계적으로 IT를 기반으로 한 통신-방송 융합서비스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통신 및 방송 정책과 규제 기능을 일원화해 새로운 국가 성장 동력을 창출하겠다는 의지로 방송통신위원회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기존의 방송위원회·통신위원회·정보통신부 등을 하나로 합친 매머드급 조직을 창설했다.
하지만 그 조직 구성과 역할을 보면 미국 FCC를 베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다만 광우병 관련 외교 문서 번역을 잘못했다는 이 정부가 이번에도 오역을 했는지 방통위는 FCC와 한 가지 점에서만 다르다. 독립 기구인 FCC와 달리 방송통신위원회는 대통령 직속이라는 점. 차라리 100% FCC를 그대로 베꼈으면 나았을 것 같다.
케빈 마틴은 아무리 독립 기구라 하더라도 부적절한 인사가 그 기구를 맡을 경우 권력의 시녀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독립 기구가 아닌 대통령 직속 기구인 한국 방송통신위원회는 사정이 어떨까. 불행히도 독립성 상실을 심각하게 우려할 만한 상황으로 보인다.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부터 이명박 캠프의 언론 대책을 총괄했기에 임명 당시부터 논란의 대상이 됐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행보 때문이다.
이번 달만 해도 최 위원장은 청와대의 대선 당시 언론특보 초청 만찬(10일) 및 한미자유무역협정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열린 당정협의회에 참석하고(11일), 업무 보고를 해야 하는 국회 대신 국무회의가 열린 청와대로 향했다가 '탄핵' 압박을 받고서야 뒤늦게 국회로 향해(13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6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쇠고기 협상의 경우 언론 홍보나 대응에 미흡했다"며 "사전에 체계적으로 홍보하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고 발언한 것도 방송통신위원장 직분보다는 청와대 홍보수석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었다.
최 위원장은 '부시의 푸들' 노릇으로 일관하다가 사면초가에 몰린 케빈 마틴의 뒤를 따를 것인가.
선택은 최 위원장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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