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아이와 '내외'하지 않고 같이 씻는다. 김이 서린 목욕탕에서 "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이냐?"라고 장난을 친다. 아이는 매번 비명을 지르면서 나에게 '달겨들어' 떨어지지 않는다. 진저리를 치는 아이의 몸을 느낀다.
내가 사는 '군산'도 진짜 군산은 아니다. 아악! 그러면?
지금 고군산군도라고 부르는 곳에는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신시도, 야미도 같은 10개의 유인도가 있다. 그리고 20개의 무인도가 있다. 나는 올해 초, 신시도 월영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봤다. 30여 개의 섬들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은 산과 같았다. 옛사람들도 같은 생각, 그래서 군산(群山)이었다.
고군산군도 팔경을 홀로 독점하고 있는 선유도에 갔다. 우리 아이와 친구 길림의 큰아들 지섭이를 데리고서. 배에서 지나치게 까불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둘은 유희왕 카드놀이에 빠져 있었다. 바다는 하늘빛을 빼다 박아서 푸르렀다. 내 힘으로는 닦이지 않는, 먼지 낀 카메라로 보는 풍경은 흠집투성이, 마음이 상했다.
새벽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인터넷으로 본 뉴스에는 20년쯤 세월을 돌려버린 소식들뿐이었다. 2008년 5월 25일이 분명한 데 내가 아직 중학생이던 세상 같았다. 새로 대통령이 바뀌고 보낸 3개월이 100년 같다는 시민들이 밤을 꼬박 새워 도로에 있었다. 물대포가 등장하고, 경찰은 폭력 진압을 했다.
신선이 놀았다는 선유도는 딴 세상이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약초와 들꽃이었다. 나는 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에서 준비한 선유도 들꽃 약초 기행을 따라왔다. 한의원을 하는 최연길님과 약초 연구를 하는 학생들이 안내했다.
젊은 엄마들은 새로운 약초가 나올 때마다 영화제 때 레드카펫을 걷는 배우를 보듯 바짝 붙어서 열광했다. 사진을 찍고, 이름과 효능을 적었다. 거기에다가 시작할 때 설명을 도맡았던 남학생한테는 "약초도 잘 알아, 공부도 잘해, 인물까지 돼, 아~" 하면서 '작업'도 걸었다.
나는 조금 뒤로 처졌지만 어릴 때 갖고 놀던 풀들을 만나서 기뻤다. '묏똥' 주위에 있던 달짝지근한 꿀 풀, 껌처럼 씹어 먹던 '삐비', 그리고 맛이 신 괭이밥. 시골 아이였던 시절로 돌아가서 먹어봤다. 맛은 각각 달고 신데도, 어쩐지 밍밍했다.
아무렇게나 따서 먹고 놀았던 풀들이 항암 치료도 되고, 화가 나는 것도 덜어주고, 오줌도 잘 나오게 하고, 갑상선을 낫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5일 장날에 약장수가 천막에서 만병통치약을 팔 때 듣던 말이랑 비슷한데? 전문가의 최대 강점은 쇼를 보여주지 않아도 믿음을 주는 법,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날마다 동네 뒷산에 본부를 만들어 놀던 때는 지나치게 예쁜 버섯이나 열매들은 경계했다. 궁금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온갖 풀과 나무 열매에서 먹는 것과 못 먹는 것, 약과 독을 알아냈을까. 중죄를 진 사람에게 먹여서 골라냈을 거라 여겼는데 예전부터 독초에는 감초나 콩죽, 녹두죽, 물로 해독했다고 한다.
군산으로 돌아가는 배는 오후 4시 30분, 4시간의 자유시간을 줬다. 잠깐 막막했다. 올 2월에 이 아이 둘을 데리고 고흐 그림을 보러 서울에 간 적 있다. 아무리 기고 날아도 미술관 안이라 안심할 수 있었는데 툭 터진 섬, 자주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아이들한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처지였다.
"인제 우리 뭐 할 거야?"제규와 지섭이가 묻는 순간, 나는 모험보다는 안정으로 기울어졌다. 그전에 몇 번이나 선유도에 와서 자전거를 타 봤다. 이 섬에는 자가용이 없다. 뭍에서 배가 들어오면 동네 사람들은 리어카로 짐을 실어 날랐다. 지금은 그 일을 승합차가 대신하지만 몇 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빌려 타거나 걷는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선유도에서 장자도로 넘어갔다. 섬과 섬 사이로 놓은 다리 위에서 파랗고 고요한 바다를 보자고 했다. 아이들은 '2MB'스러운 데가 있다. '초딩'에다 길도 모르니까 당연히 내 마음을 읽으면서 움직여야 할 터인데도, 소통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다시 질러서 가버렸다.
장자도는 순박했다. 다리를 건너왔을 뿐인데 정서가 달라졌다. 길에서 횟감을 팔거나 호객 행위 하는 사람, 자전거 빌려주는 곳이나 만물 슈퍼가 없었다. 민박집까지 소박해서 장자도 자체는 북적임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길이 난 대로, 막다른 곳까지 가 봤다.
선착장 아래에서 낚시하는 젊은이 세 명을 만났다. 바닷물이 깨끗해서 그네들이 맨발 벗고 있는 바다 속이 보였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5분 만에 작은 우럭 한 마리를 잡고 나서는 입질조차 없다는데도 즐거워 보였다. 그 기분은 구경하는 우리한테도 전염되었다.
그네들은 사진 찍으라며 자세도 잡아주었다. 아이들은 제가 잡은 우럭인 것처럼 뿌듯해하며 가지고 놀았다. 한자리에 머물러 노는 건 평온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리듬을 타는 중인데 확 덮쳤다. 우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젖은 옷을 털고 갈 채비를 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이거 먹는 거예요?"갯바위 저쪽에서 한 아이가 말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렇게 불릴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아줌마라고 부르면 발끈할 수 있는 나이를 지났는데도,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내 이름을 내려놓고 '제규 엄마'나 '아줌마'가 되었다는 현실을, 순간 잊고 있어서 머쓱했다.
이름을 내어준다는 건 포기가 아니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온 국민이 '배후세력'으로 불리어도 끄덕없는 것처럼. 원래 군산이었던 선유도도 해군기지가 진포로 옮겨갈 때에 자신의 지명까지 딸려 보냈다. 그리고는 오랜 세월, 새만금이라는 존재와 '맞짱' 뜨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