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곽 파노라마를 보지 못한다면
곡장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진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동대문에서 이곳 곡장까지가 서울 성곽의 1/4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곡장이 북쪽 방향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우리가 지나온 성곽과 앞으로 나갈 성곽을 가장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온 숙정문 쪽으로의 조망보다는 앞으로 나갈 북악산과 인왕산 방면으로의 조망이 훨씬 좋다.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의 파노라마는 서울 성곽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하나의 예술이다.
북악산의 성곽은 정상보다 북쪽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인왕산의 성곽도 정상 바깥으로 연결되어 남쪽은 서대문으로 북쪽은 서울 성곽 그리고 북한산 성곽과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서울 성곽의 정상인 북악산에 올라야 하고, 북악에 가기 전에 먼저 청운대에 올라야 한다.
청운대는 '푸른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북악의 옛날 이름이 백악이니, 서울 도성 북쪽의 두 봉우리 청운과 백악이 색깔도 잘 어울리고 발음상 어감도 좋은 편이다. '푸른 구름에 휘감겨 있는 하얀 묏부리', 이름 하나에서도 정말 선인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다.
청운대에 가다 보니 서울 성곽 축조 방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태조 때의 메줏돌, 세종 때의 장방형돌, 숙종 때의 정방형돌, 쉽게 구별이 된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면서 돌의 크기가 조금씩 커진 것도 또 큰 차이이다.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돌을 깨고 다듬고 운반하는 능력이 나아졌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청운대(293m)에 이르니 남북으로의 조망이 특히 좋다. 남쪽으로는 가까이 경복궁이 보이고 조금 더 바깥으로 남산이 잘 보인다. 북쪽으로는 곡장 왼쪽으로 북한산 보현봉이 눈에 들어온다. 청운대는 돌로 된 마루가 없고 흙으로 된 평지가 정상이다. 위를 둥글게 다듬은 화강석에 검은 색으로 청운대라는 글씨를 새겼다.
성벽에 새겨진 글자들
청운대에서 북악산은 다시 한 굽이 내려갔다가 올라가야 한다. 가다가 보니 성벽에 새겨진 글자들이 눈에 띈다. 이것은 공사 구역 표시, 공사 담당 군현, 공사 일자,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이라고 한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가경 9년(1804) 갑자 10월 일 패장 오재민 감관 이동한 변수 용성휘(嘉慶 九年 甲子 十月 日 牌將 吳再敏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이다.
여기서 패장은 일 전체를 책임지는 관리이고, 감관은 감독관이며 변수는 기술자이다. 시간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서울 성곽에서는 공사 구역과 공사 담당 군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동대문 지역에서 천(天)자로 출발하여 낙산, 북악산, 인왕산, 남산을 거쳐 조(弔)자로 끝나는데 이것이 공사구역 표시란다. 그리고 의령시면(宜寧始面), 흥해시면(興海始面)이라는 글자를 통해 공사를 담당한 군현이 의령과 흥해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글자가 있는 성벽을 지나 어느 정도 가니 소나무가 하나 보인다. 옆에 설명이 있어 보니 이게 1·21사태 때 총탄을 맞은 소나무란다. 실제로 나무에 총탄 흔적이 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 한 분은 그 설명문을 열심히 메모지에 기록한다. 우리보다 한 세대 앞선 분들의 생활방식이다. 정직하고 꼼꼼하고 고지식한 이 소나무에서 오르막길을 한 5분 정도 오르면 서울 성곽의 최고봉 북악산에 이르게 된다.
서울 성곽 최고봉인 북악산에서 지세를 살펴보니
북악산(342m)은 서울 도성 북쪽에 위치하는 주산이다. 북악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골산이지만 현장에 올라보면 돌과 흙이 적절하게 섞여 그런지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 산에 나무들이 많아 암산의 강팍함이 어느 정도 가려지는 것 같다. 특히 소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부터 보호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 북악산에는 208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고, 그 중 나무가 81종에 달한다. 키 큰 나무로는 소나무 외에 참나무와 산벚나무 등이 있으며, 키 작은 나무로는 진달래, 철쭉, 쥐똥나무 등이 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새로운 나무들이 심어졌는데 토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사방용 수종이었다. 대표적인 수나무로는 아카시나무, 은수원사시나무, 리기다소나무가 있다.
북악산은 서울 성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사방으로의 조망이 상당히 좋다. 남쪽으로 저 멀리 조산인 관악산과 조응을 하고 북쪽으로 북한산 능선을 따라 지맥이 이어진다. 북한산의 지맥이 이곳 북악으로 흘러든 다음 경복궁으로 내려가 모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경복궁을 지나 흘러가는 수맥은 청계천을 따라 동류한 다음 행당동에서 중랑천과 만나고, 중랑천은 다시 뚝섬과 옥수동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것이다.
서울의 젖줄인 한강이 고층건물과 아파트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동에서 서로 흐르면서 서울의 남과 북을 나누고 있다. 서울은 산과 물 그리고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아주 이상적인 도시였는데 요즘은 사람이 너무 많아 몸살을 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렇게 높은 곳에서 보니 복작대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인간들이 이루어놓은 현대적인 도시의 모습만 눈에 들어온다. 한 마디로 대단한 인간들이다.
"북악산이 맞는 거요 아니면 백악산이 맞는 거요?"
북악의 정상은 동쪽 말바위 쉼터와 홍련사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 서쪽 창의문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정상에 있는 바위인 북악마루에는 사람들이 연실 올라간다. 자신이 최고봉에 올랐음을 보여주려는 듯이. 우리도 역시 다 함께 올라 단체사진을 찍는다. 북악마루에 올랐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북악마루를 내려와 시내를 조망하고 있는데 표지석을 살펴보던 어르신이 '북악산이 맞는 거요 아니면 백악산이 맞는 거요?' 하고 물어온다. 나는 과거에는 백악산이라 불렸는데 조선 후기에 와서 북악산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주로 백악산으로 불린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잘 알겠다는 듯이 수긍을 한다.
그러나 나중에 문헌을 확인해 보니 조선 초기 문집에서도 북악산이라는 표현이 가끔 보인다. 그러니까 조선 후기에 쓰이기 시작했다는 나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사실을 좀 더 정확히 알기 위해 나는 한국 고전번역원(
www.minchu.or.kr) 자료를 검색해 보았다. 백악산이라는 표제어를 입력하니 총 226건의 자료가 확인된다.
이에 비해 북악산이라는 표제어를 입력하니 16건의 자료가 확인된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 대세는 백악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북악산이라는 말은 영조 29년(1753)에야 처음 나온다. 그 해 5월 15일 기우제를 지낼 곳으로 삼각산, 목멱산, 한강과 함께 북악산이 거명되고 있다.
백악산과 북악산을 읊은 시장주(長洲) 홍만종의 '소화시평(小華詩評)'에 따르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백악산에 올라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무인이었던 이성계가 이 정도 시를 지었다면 그의 문인으로서의 자질도 확인할 수 있다. 새로 정한 수도 한양의 아름다움을 산줄기와 물줄기를 원용하여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 태조(太祖) 임금께서 백악산(白岳山)에 올라가서 지은 시에 이르기를,우뚝이 높이 솟은 봉우리 북두성에 닿았구나. 突兀高峯接斗魁한양의 아름다운 경관을 하늘이 열었다네. 漢陽形勝自天開대륙을 깔고 앉은 봉우리가 삼각을 받쳤는데 山蟠大陸擎三角오대산을 나온 긴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라. 海曳長江出五臺그 필력(筆力)이 호기롭고 장대하여 가히 저 한 고조(漢高祖)의 ‘대풍가(大風歌)’와 더불어 서로 자웅을 겨룰 만하다.그리고 이덕무도 <아정유고>에 칠언 고시(古詩)로 '성시전도(城市全圖)' 1백운(韻)을 남기고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장가인 이덕무는 한양 도성을 읊으면서 백악의 정기를 받아 한양 도성 안에 인재가 많이 남을 노래하고 있다.
구천 구백 칠십 보의 九千九百七十步흰 성벽 띠와 같이 둘러 있네. 粉堞如帶明千雉별처럼 벌여 놓고 바둑처럼 늘어놓아 공고히 다졌으니 星羅棋置鞏如許범이 쭈그린 듯 용이 서린 듯 수려하기 그지없네. 虎踞龍蟠秀無比북쪽에는 백악만큼 좋은 산 없고 北山無如白岳好오른쪽에 인왕산을 끼었으니 백중과 같네. 右把仁王伯仲似영험한 기운 모여 돌 빛이 푸르르니 英靈所鍾石氣靑그 아래 훌륭한 선비가 많이 난다네. 其下往往生奇士이에 비해 초간(草澗) 권문해는 '비온 후 글로 마음을 표현하다(雨後書懷)'에서 선비의 유유자적한 삶을 이야기한다. 배경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한양이고 계절은 늦은 봄이다. 그는 자연풍경을 묘사하면서 북악산을 도입하고 그것을 통해 삶을 선적(禪的)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웃해 사는 청학이 시끄러운 가운데 쉬고 住隣靑鶴息塵機길은 끊어지고 사립문 닫는 발자국 소리만 들리누나. 逕絶跫音獨掩扉저녁나절 지는 꽃이 비를 따라 스러지고 半夜殘花隨雨盡 여러 소리로 우는 새 봄이 감을 아쉬워한다. 數聲啼鳥惜春歸구름 북악에 가벼이 걸려 산을 씻는 듯하고 雲輕北岳山如洗따뜻한 바람에 동쪽 교외 풀 자라난다. 風暖東郊草正菲자리에 앉아 노향을 맡으며 아무 말 하지 않으니 坐對罏香無一語 맑은 마음 금할 수 없어 낚싯대 드리운다. 不禁淸興落苔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