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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항쟁 서울의 한 거리에서 태극기를 펼쳐들고 있는 시민들
87년 6월항쟁서울의 한 거리에서 태극기를 펼쳐들고 있는 시민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 촉구 24차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31일 저녁 서울 태평로에서 '아고라' 네티즌과 시민, 학생들이 경찰바리케이트를 향해 행진을 벌이고 있다.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 촉구 24차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31일 저녁 서울 태평로에서 '아고라' 네티즌과 시민, 학생들이 경찰바리케이트를 향해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1987년 6월을 떠올릴 때면 늘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은 가슴 벅차오르는 무엇인가이다. 열여덟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참여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되새겼기 때문이다.

앳된 고교 2년생이 조금 일찍 현실에 눈을 떴던 탓에 남들 다하는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갖은 핑계로 피한 뒤 연일 거리로 나섰던 87년 6월. 그날의 여운은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정해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1987년으로 되돌아간 2008년의 거리

21년 만에 당시 6월의 거리를 행진했다. 주말 촛불시위에서다. 내가 언제 이 거리를 이렇게 행진했던지 아마득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소공동 한국은행 앞과 명동입구, 롯데백화점 앞은 87년 당시의 시민과 경찰들이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너무 오랜만에 이 거리를 걷자니 괜히 감회가 새로웠다.

2008년 5월의 마지막 날. 도심을 행진하는 순간 내 머릿속의 기억은 1987년으로 되돌아 간 듯 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를 메웠던 사람들은, 고시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그 당시에 목쉬어라 불렀던 훌라송과 아침이슬, 애국가가 똑같이 합창되고 있었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 훌라, 군사독재 타도하자 훌라 훌라'가 이명박은 물러가라로 바뀌었을 뿐.

그리고 청와대 코앞까지 진출한 심야시위. 을지로와 종로, 명동성당에서 새벽까지 독재정권과 맞섰던 87년 6월의 상황은 2008년 6월의 첫날 재현되고 있었다. 87년과의 차이가 있다면 공수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 당시에는 독재정권이 명동성당을 장악하기 위해 밤새 거센 공격을 퍼부은 것인데 반해, 이번에는 시민들이 청와대 앞으로 가서 이명박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공세를 취하는 모양새였다.

곤봉으로 시민 내려치는 경찰 1일 아침 안국동 사거리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도망치는 한 시민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려치고 있다.
곤봉으로 시민 내려치는 경찰1일 아침 안국동 사거리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도망치는 한 시민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려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87년 6월항쟁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시위대에 포위돼 무장해제 당한 경찰들
87년 6월항쟁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시위대에 포위돼 무장해제 당한 경찰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서슴치 않고 자행되는 폭력 또한 87년 전두환 정권의 경찰이나 08년 이명박 정권의 경찰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87년 6월 본대에서 고립돼 한국은행 앞에서 잡힌 20여명의 경찰들에게 시민들은 '비폭력'을 그들에게 물과 음료수를 주며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아랑 곳 없이 경찰은 정권이 말하던 '불순세력의 난동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거센 곤봉과 최루탄 세례를 시민들에게 안겨줬고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 이후로 시민들 또한 더 이상 관용을 베풀려고 하지 않았다.  

1일 새벽 청와대 앞. 시민들과 대치하던 경찰이 몸싸움 여럿 시민들에게 붙잡혀 끌려 나왔지만 혹여나 누가 때릴 까봐 '비폭력'을 외치며 안전하게 보호해 경찰진영으로 넘겨줬다. 게다가 몸싸움 끝에 빼앗은 하이바와 방패마저 기꺼이 돌려주는 관용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경찰의 물대포 세례와 곤봉일 뿐이었다. '불법 집회를 해산'한다는 명분아래 방패로 내려찍으며 구타를 서슴치 않는 그들 덕택에 시민들은 하염없이 맞아야 했다.

87년 6월의 학생 시민들에게 돌과 화염병이라는 자위수단이 있었지만, 2008년의 선량한 시민들에게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일방적으로 당하고 깨져야만 했다.  

87년 민중에게 거침없는 폭력을 행사하다 시민들에게 몰매를 맞던 전경들의 모습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행태가  21년 전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백골단을 대신해 등장한 경찰특공대는 여성대원이 포함된 것만 다를 뿐 날렵한 몸짓으로 시민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있었다.

폭력 행사한 경찰에 관용 접은 시민들

지하철 연결통로로 이동하며 '고시철폐 협상무효' 등을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은 을지로 지하도로 움직이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대학생들의 모습이었고, 시청 잔디밭 한 켠에 쌓인 시민들의 지원물품은 명동성당 농성장으로 답지하던 성금과 물품들을 떠오르게 했다.

배후세력, 불법점거시위 등을 운운하며 시민들의 폭력성이나 불법성을 부각시키려는 청와대와 조중동의 반응은 어쩜 그리 당시 제도언론과 군사독재의 판박이인지 놀랍기만 하다.

 31일 밤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 촉구 24차 촛불문화제를 마친 시민, 학생 수천명이 사직공원을 지나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벌이고 있다.
31일 밤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 촉구 24차 촛불문화제를 마친 시민, 학생 수천명이 사직공원을 지나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하지만 1987년과 2008년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민주정권 10년 동안 알게 모르게 축적돼온 시민사회의 커진 역량이라는 점이다. 적어도 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확실히 체험한 세대가 각종 제도를 통해 넓혀온 민주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20년 전 보다 비할 데 없이 성장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삼오오, 가족 친구들끼리 모인 수만의 촛불시위대가 80년대 온갖 물리적 충돌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없었던 청와대 입구까지 나아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일한 행진대오가 있는 것도 아니고 흐르는 물처럼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와 막히면 돌아가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방식으로 필요 없는 충돌을 자제한 채 청와대로 향하는 그들에게 철옹성 같던 경찰 저지선은 가볍게 무너지고 말았다.

수만의 시위대가 청와대 앞에까지 진출해 밤을 새워 시위를 했던 적이 4.19 이후 또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시위에 참여한지 20년이 넘지만 청와대 부근까지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편으로 시위대의 풍경 또한 80년대와는 차이가 있다. 시위대 맨 앞에서 경찰과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면 후미에서는 열심히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독려하던 풍경이 8~90년대 모습이라면, 2008년은 그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선두에서 몸싸움과 노래, 구호를 외치고 후미에서는 삼삼오오 불 피워 놓고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거나 기념 촬영하는 모습.

80년대 혹시라도 길가다가 경찰이 눈에 띌 때면 불심검문으로 잡혀갈까 싶은 마음에 시선을 안 마주치려 위해 애썼는데, 지금은 철수하는 경찰 앞에서 왜 폭력적으로 진압 하냐는 항의가 거침없이 이어진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노래로 부르는 그들에게 권력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6월이 돌아왔다

 6월 항쟁 당시 시위에 참가한 '넥타이 부대'
6월 항쟁 당시 시위에 참가한 '넥타이 부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다시 6월이 왔다. 거리는 그때처럼 무더워지기 시작했고, 쇠고기로 촉발된 시민의 분노는 더욱 고조되는 분위기다. 호헌으로 인해 긴장감이 높아지던 87년처럼. 연일 이어지는 촛불시위는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와 박종철 고문 은폐 조작에 대한 분노로 당시 재야시민단체와 대학가에서 연일 벌어지던 규탄성명과 시위를 연상케 한다.

20대 대학생들이 이끌며, 넥타이 부대의 가세했던게 1987년이었다면 2008년에는 10대들이 붙인 불이 3~40대를 거쳐 20대로 옮겨지고 있다.

6월 항쟁 당시, 독재정권에 큰 타격을 가한 방법이 전국동시다발시위였는데, 이에 비견되듯 촛불의 수 또한  전국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당시 수백만의 시위를 군사독재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어느 한쪽에 집중됐다면 막기가 편했겠지만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의 무장이 시위대에 의해 해제되게 만들었다.

6월 항쟁 21년을 맞는 2008년. 8~90년대 시위 진압 매뉴얼로 국민들의 분노를 대응하는 듯한 이명박 정권의 모습은 그래서 심히 우려가 되는 부분이다. 그 당시보다 한참 높아진 시민사회의 의식을 도리어 그때보다 더 못하게 보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불법폭력시위와 사회혼란세력은 단호히 척결해야한다'고 떠들다가 결국 항복선언을 했던 군사독재정권과 당시 민정당의 전철을 이명박 정권은 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6월 항쟁 21주년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쇠고기 6·29를 내 놓기 바란다.


#6월항쟁#촛불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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