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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터. 창덕궁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굿터는 궁중여인들의 투기의 장이었다. 수복강녕을 비는 굿이 아니라 시기의 대상을 저주하는 굿이 행해졌던 곳이다. 삼복더위에도 냉기가 감도는 음산한 곳이다.
굿터.창덕궁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굿터는 궁중여인들의 투기의 장이었다. 수복강녕을 비는 굿이 아니라 시기의 대상을 저주하는 굿이 행해졌던 곳이다. 삼복더위에도 냉기가 감도는 음산한 곳이다. ⓒ 이정근


긴급 전투력 복구 작업에 나선 인조는 어영청으로 하여금 가용병력을 확인하여 보고 하라 명했다.

"난리를 치르면서 죽거나 포로로 잡혀간 유고자를 제외하고 본청의 군병을 조사하니 현재 남아 있는 실제 수효는 5423명입니다. 이중 출신자는 762명입니다."

보고를 받은 인조는 눈앞이 캄캄했다. 5천 군사로 수십만 군사를 어떻게 대적한단 말인가? 그것도 기간 병은 7백여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강제로 끌어 모은 오합지졸이라니 아득했다.

"강무를 실시하기 전에 관사하고자 한다. 해조는 준비하라."

본격적인 군사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무인들을 시험하겠다는 것이다. 지휘관들의 평소 전투력을 검증하기 위하여 도성 외곽에 사장을 마련하고 활쏘기 시험을 보는 것이 관사(觀射)다.

"무진년 관사 때에 당상 이상 무신과 훈련도감의 장관, 내삼청(內三廳)의 금군, 각 아문의 군관은 그 수효가 매우 많아 하루 안에 다 시험을 치르지 못했습니다. 미리 시재(試才)하여 합격한 뒤에 시험을 치르도록 허락한 전례가 있으니 지금의 경우도 이에 따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예비고사에서 걸러내고 본 고사를 치르자고 병조가 보고했다. 잘 훈련된 사병이 받쳐주는 바탕에서 소수의 군관이 지휘봉을 잡아야 건강한 군대인데 머리만 크고 하체는 부실한 군대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하부의 군졸은 숫자에 불과하고 상부의 군관들은 모두들 관직을 꿰어차고 있다는 얘기다.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라."

군대조직 자체가 기형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데 임금이라고 별도리가 없었다. 마음은 앞서가는데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궐내 투기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저주옥(詛呪獄)' 사건이다. 궁궐에서 흉측한 물건이 발견되었다는 내수사의 보고가 올라왔다.

"저주한 물건이 시어소에 14곳, 동궁에 12곳, 인경궁에 26곳, 경덕궁에 4곳이나 됩니다. 이것은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매우 사특한 사람이 대궐 안에 숨어서 무리들을 사주하여 간특한 일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는 어찌 신분 낮은 하천배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묻은 곳이 대부분 굴뚝과 연통 및 계단 사이에 있어 외부 사람들의 발길이 미칠 수 없는 곳입니다.

이는 반드시 청소나 군불을 담당한 무리들의 소행임이 분명합니다. 궁에서 숙직하거나 근무하는 자들이 그 모의에 가담하였거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흉역을 행한 자의 죄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수상함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자 또한 큰 죄에 해당됩니다. 이들을 모두 신문하도로 윤허하여 주십시오."

수라간.  임금의 음식을 요리하는 곳으로 제조상궁을 비롯한 색장 등 궁중 여인들이 많이 있었던 곳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수라간. 임금의 음식을 요리하는 곳으로 제조상궁을 비롯한 색장 등 궁중 여인들이 많이 있었던 곳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이정근

보고를 받은 인조는 의금부에 추국청을 설치하여 철저히 조사하라 명했다. 대전 상궁을 비롯한 나인, 무수리, 무녀 그리고 수라간 상궁과 그 가족들이 줄줄이 내수사에 투옥되었다. 내수사에서 1차 심문을 받은 죄인들은 의금부에 넘겨져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받았다.

"다스리기 곤란한 옥사는 저주에 관한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범행이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그 자취가 드러난다 하더라도 물증이 없습니다. 비록 정범을 잡아 신문한다 해도 그가 실토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서 그 실상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기옥에게 형문 6차, 압슬 1차, 낙형 1차를 가하고, 소아에게 형문 6차, 압슬 1차를 가하고, 서향에게 형문 7차, 압슬 1차를 가하고, 차귀현에게 형문 6차를 가하였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의금부의 보고를 마지막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범인들이 죽었다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허나, 범행에 가담한 하수인들이 죽음으로 비밀을 지킨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입에서 진실이 드러날까봐 불안에 떨던 보이지 않은 손이 의금부를 움직였고 의금부는 그들의 입을 틀어막는데 충실히 따랐다.

무주공산은 먼저 차지한 자가 임자다

당시 내명부의 세력판도는 묘한 지형도를 그리고 있었다. 인목대비가 살아 있을 때에는 대비가 내명부의 수장으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대비가 죽은 이후에는 위계질서가 무너졌다. 왕비가 죽어 중궁전은 비어 있고 정1품 세자빈은 심양에 볼모로 가 있으니 공동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 빈자리를 소원 조씨가 꿰차고 있었다. 하지만 소원은 정4품이다. 소원 조씨는 이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 생전부터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조씨는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왕비는 물론 후궁도 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경상도 관찰사급 관직에 있었으나 어머니가 양첩이었기 때문에 그 신분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러한 조씨에게 임금의 총애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갖은 방중술로 인조를 사로잡은 조씨는 효명옹주와 숭선군을 낳았고 나이어린 계비가 들어왔으나 순순히 그 자리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중전은 국모로서 예외이긴 하지만 궁중 여인들은 나라의 안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임금의 총애에 관심이 있다. 그것이 지상과제다. 아니 오면 와주기를 바라고, 오면 보내지 않고 싶은 것이 궁중 여인들의 심리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금이 다른 여인에게 가는 것은 눈에 쌍심지를 켠다. 인조는 한동안 새로 맞이한 중전 침소를 자주 찾았다. 더욱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있다. 이들이 귀국하지 않으면 숭선군에게 희망이 있다. 소원 조씨의 선택은 명약관화하다.

굿터. 흐르는 물줄기가 음기를 뿜고 있다하여 굿터로 이용되었다.
굿터.흐르는 물줄기가 음기를 뿜고 있다하여 굿터로 이용되었다. ⓒ 이정근

청나라와 한 번 겨뤄야겠다는 격무에 시달렸을까? 소원 조씨의 몸을 아끼지 않은 과공에 녹초가 되었을까? 임금이 쓰러졌다. 인조가 병이 나서 눕고 만 것이다. 병석에 누운 임금이 이형익을 불러 번침을 맞았다. 이형익은 어의는 아니었으나 소원 조씨의 천거로 궁에 들어와 임금을 치료하는 의원이었다.

"침소 가까운 땅에서 사특하고 더러운 물건을 찾아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하니 신들은 놀라움에 무슨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즉시 다른 곳으로 옮기시고 다시 수색하여 궁궐 안에 더러운 기운이 말끔히 없어지게 하소서. 그런 뒤에 돌아와 계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찌 더러운 물건을 소제하였다 하여 이대로 궁궐에 계실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병환에 놀란 대신과 육경이 몰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인체의 질환은 사특한 기운이 몸에 들어와 변고를 부린 것이니 장소를 옮기는 것 또한 치료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달리 옮길 만한 곳이 없으니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더러운 기운이 뜰과 문 사이에 붙어 있어서 그것이 스며들어 빌미가 되므로 만일 깨끗한 곳으로 피하지 않으면 병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장부와 혈기는 신분 고하에 상관이 없는데 게다가 전하께서는 침을 맞고 약을 드시는 중이니 병환을 돌보시는데 모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더러운 물건은 이미 다 찾아냈으니 옮기지 않더라도 저절로 회복될 것이다."

인조는 자신의 병이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이라고 차마 입 밖에 내지를 못했다.

"거처를 옮기시는 일을 전하께서 폐단이 있다고 여기시나 신하들은 모두 매우 답답하게 여깁니다. 잠시 옮기시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도승지 이기조가 거듭 주청했다.

"의관들이 하나같이 전하의 환우를 위하여 거처를 옮기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최명길이 피접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때 곁에 있던 이형익이 끼어들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옮기셔도 차도는 없을…."

이형익을 바라보는 최명길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이는 조정의 논의에 관계되는데 네가 감히 나선단 말인가?"

최명길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형익은 아무 말 못하고 물러갔다. 인조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즉각 심양에 전달되었다. 부왕의 병환소식을 전해들은 소현세자는 억장이 무너졌다.

"아바마마께서 병환에 누우셨는데 시약한번 못 드리고 소신은 불효자입니다."

소현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하지만 걱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즉시 황궁에 통지했다. 통보를 받은 예부에서 회신이 왔다.

"상후가 불편하시다는 말을 듣고 문질 하라는 황제의 명이 계셨다. 곧 차관이 떠날 것이다. 그리고 세자는 책봉례를 준비하라."

청나라가 신속하게 반응했다. 인조 이후의 조선을 생각하고 있는 청나라는 인조가 어여뻐서 문병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문질(問疾)이다. 질환을 알아보고 차후 대책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 계획에 세자 책봉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영청#내삼청#인조#소현세자#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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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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