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릴 기다린 것은 '물대포'가 아니라 '하얀 분말'
지금 내 방에는 아직도 하얀 자국이 남아있는 가방이 컴퓨터 옆에 기대어 서있다. 물수건과 걸레 등으로 열심히 닦아보았지만 가느다란 틈사이로 구석구석 박혀있는 흰색 분말들을 완벽히 제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모든 것이 지난 6월 1일 5번째로 다녀온 촛불집회에서 시작되었다.
청와대 진출을 시도했던 5월 31일의 촛불집회의 영향 때문인지 집회 시작 전부터 세종로 일대는 대로부터 작은 골목길까지 전경과 차량으로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었다. 수만 명의 시민이 광화문 사거리에 포위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지혜를 발휘해 줄을 전경차량에 걸어 줄다리기 하듯 끌어냈다. 그렇게 차량 2대를 끌어내 간신히 만들어낸 틈 사이에서 나를 포함한 시민들은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전날 집회에서 경찰이 사용한 물대포로 많은 시민들이 다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미리 준비해 온 넓은 파란 천막 천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해 발사된 것은 물대포가 아니라 숨조차 쉬기 어려운 하얀색 분말이었다. 2열의 전경들은 채 1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손에 무언가를 들고서 시민들을 향해 조준 발사하기 시작했는데 시큼한 맛의 하얀색 가루를 맞으니 무엇보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간이소화용구, 제대로 알고 시위대에 뿌렸나?이 정체불명의 하얀색 분말은 무엇일까. 나는 시위가 소강상태일 때 거리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위 사진에서와 보이는 바와 같은 '간이소화 용구'였다. 이른바 '할론 소화기'라 불리는 이 소화기에 대해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일반소화기와 달리 약제로 할론 1211을 사용하는 것이 특색으로 절대 얼굴에 방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유의사항이 돋보였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궁금증을 다 해소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소방서에서 의무소방으로 군복무를 마친 선배에게 이 간이소화용구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의무소방으로 복무한 선배와 할론소화기에 대해 나눈 메신저 일문 일답 |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형 간이소화용구라고 아시나요?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응 플라스틱으로 된 거 조그만 거 알지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좀 알려주세요 ㅎ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그거 많이 차고 다녔어 음 뭘 알려줘야할지 - -;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화재에 효과가 있나요? ㅎ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아 초기 화재시에 화점에 바로 뿌리면 효과는 있지만 그 외에는 효과 없어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어떤 매커니즘인지는 모르시죠?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잠깐만 가물거려서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탄화수소의 할로겐 화합물을 소화약제로 사용 무색 투명의 액체 또는 기체로서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특유의 강한 취기를 가지며 공기보다 무거운 불연성 연소물 주위에 채류하여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체류하여 질식소화 동시에 연쇄반응 차단으로 억제작용 및 냉각효과로 소화시킨다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그렇군요. 위험한가요??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산소농도를 떨어뜨리는 원리야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흠. 그것만 보면 생각보다 위험하진 않은 거 같은데?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좋을 거야 없지 당근..탄화수소 화합물인데 소방학교 교본 보는 중 ㅋㅋ 근데 당연히 몸에 해롭지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완전 직사하더라구요;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왜냐면 소화기 안에 있는 건 다 화합물이고 약제니까 몸에 안 좋지.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찾아보니 질식할 위험도 있다는군요. 꽤 맵던데요. 화생방만큼은 아니지만 ㅎ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소화약제는 분말이 습기로 덩어리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금속의 스테아린산염이나 실리콘 등을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첨가제로 사용하여 표면처리를 한다 그 자체로는 독성이 없다. 그러나 방사도중 사람이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그 속에 노출되면 호흡장애와 시야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주변의 산소농도를 떨어뜨려서 일시적으로 질식효과를 낸다는 거.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교본에 있는 내용인가요?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ㅇㅇ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교본이름이 정확히 뭐죠??
XXX ( A Distress ) 님의 말 : 중앙소방학교 교육훈련교범
이슬기 ( 이스릭_ 버담소리 ) 님의 말 : 이번 시위와 같은 밀집상황에서 피하지도 못하는데 조준분사(?)하면 정말 위험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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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3일 밤 경찰청 홈페이지(사이버경찰청)와 서울지방경찰청 홈페이지에 '촛불집회 사실은 이렇습니다' 라는 팝업창을 띄워 '여학생 사망설' 등 5가지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일부 시위대와 외신에서 제기한 최루탄 사용설에 대해서는 "일부 대원들이 다급한 심정에 휴대용 소화기를 사용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아무런 충돌도 없이 가만히 대치해 있는 상황에서 2열에 있는 전경들이 일제히 간이소화용구를 발사한 것은 다급한 심정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상부의 지시에 따른 계획적 행동이라는 의심을 면하기 어렵다. 사실 이 할론소화기가 얼마나 유해한지 여부도 중요하지만 더 큰 문제는 진압과정에 대해 경찰이 일관되게 거짓말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렇게 촛불집회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도 이명박 정부의 실수를 넘어선 말바꾸기와 거짓해명, 진실은폐 탓이 크다.
모쪼록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분들은 물대포는 물론 '간이소화용구'도 조심하셔서 이명박정부가 정말 '진실'만을 국민 앞에 고백할 때까지 다치지 않고 끝까지 남아주시길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