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재단 앞에 오마이 뉴스 중계차가 있을 거예요. 그리로 오세요."문자가 왔다. 중계차 앞은 방송 준비로 분주해보였다. <오마이뉴스>는 6·10 100만 촛불 대행진을 맞아 '생방송 자유발언대' 행사를 마련했다. 나는 이 행사를 오연호 대표와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오후 5시. 광화문 네거리와 시청, 세종로 일대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생방송 자유발언대'는 5시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한열 추모제 행사 중계 때문에 조금 늦춰져 6시가 돼서야 시작됐다. 아무런 사전 계획도, 대본도 없이 카메라 앞에서 섰다. '즉흥'이 이 행사의 중심 모토였다.
사전에 시민들도 섭외되지 않는 상태에서 바로 오 대표가 오프닝을 열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초반 상황을 매끄럽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 바통을 이어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두 명의 발언자를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잘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여중생 3총사, "중학생이 뭘 아느냐고?"
첫 번째 자유 발언자는 여중생 3총사였다. 시험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촛불집회에 나왔다는 열혈 참가자들이었다. 아이들은 "촛불 집회에 가지라 말라"는 가정통신문과 "중학생이 무얼 아느냐"며 무시하는 일부 어른들에게 화나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욕 좀 하겠다"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냥 어려보이지만은 않았다. 중간에 욕을 끊을 타이밍조차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두 번째 자유 발언자는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였다. 그는 조금 전까지 청계 광장 입구에서 민주노동당 주최 '08촛불대항쟁의 교훈과 과제' 토론회에서 강연을 했다. "소통이 불통된 것이 답답하다"는 그는 "촛불 한 개는 끌 수 있어도 하나가 된 촛불은 절대 꺼질 수 없다"며 "6·10 촛불 문화제가 역사의 새로운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행자가 따로 정리할 필요도 없는 깔끔한 발언이었다.
이 두 팀을 끝으로 '생방송 자유발언대' 1부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오 대표가 한손을 돌리며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는 사이 한 시민이 카메라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와 마이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말을 하고 싶은, 즉 나를 표현하고 싶은 시민들은 예상외로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발언대의 발언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섭외가 안 될까봐 염려했던 나의 우려는 기우였다.
학생, 교수, 목사, 스님, 농부... 거침 없는 그들
전국 각지에서 학생과 교수, 목사와 스님, 농부와 노동자, 주부 등 각계각층이 자유발언에 참여했다. 웅변하듯 외치기도 하고, 속삭이듯 작게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거칠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내뱉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오빠가 조금 있으면 군대 가서 걱정이 된다는 아이들, 엄마들이 뿔났다며 직접 뿔을 달고나온 엄마와 딸, 국내 가족들을 지키고 싶다고 한인미주주부모임에서 나온 교민까지.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직접 만든 팻말 들고 나와 설명해주는 대학생들, 대운하와 민영화 등 새 정부의 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하는 중장년들, 이명박 정부에게 바라는 것을 조목조목 따지는 어르신들. 사회 발전을 위하는 그들의 진실함도 실시간으로 방송됐다. 시민들은 제각기 다른 말들을 했지만 이곳에 나온 이유는 모두 같았다.
주어진 시간 2분을 초과해도, 손으로 얼굴과 입을 가려도, 말을 더듬거려도, 욕을 해도, 그것을 커트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행자가 서있는 것이 무색할 만큼, 시민들은 자기 발언 시간을 나름대로 이끌었다. 옆에 진행자가 있든, 앞에 카메라가 있든 사방에 사람들이 있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명석을 깔아주면 뒤로 빼는, 즉 개인을 드러내지 않는 감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의 '존재'를 알리다저녁 7시, 태평로는 쭉 늘어앉은 시민들로 가득찼다. 곧 촛불 문화제 공식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생방송 자유발언대' 1부를 마치고 촛불 대행진 후에 2부를 진행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생방송 자유발언대' 2부는 끝내 무산되었다. 촛불 문화제의 행사는 밤 9시에 끝났다. 6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청와대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 행군 앞에 끼어들어 마이크를 댈 수는 없었다. 길게 늘어져 끝이 보이지 않는 수십만 개의 촛불들이 시민들의 말을 대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