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 제종철 열사
고 제종철 열사 ⓒ 자료사진

6월 항쟁 21주기를 앞둔 지난 6월 9일에도 여전히 시청 광장은 촛불의 파도가 잔디 위로 일렁거렸다. 이날의 촛불은 한 사람을 향한 추모의 마음과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시청 광장 한 편에 마련된 빈소엔 생전의 그를 본적도 없는 시민들이 찾아와 영정 앞에 국화꽃을 내려놓았다. 지난 한 달여간 이 광장은 '나'를 위해 배제되어야 할 타인일 뿐이었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이름 모를 타인들을 하나로 모으는 온기로 가득했다.

나는 빈소 앞에서 그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인터넷에서 찾은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인도에 선 다른 촛불들과 달리 그는 차도 위에서 양 손에 두 개의 촛불을 들고 서 있다. 까만 뿔테 너머로 촛불을 건네줄 한 사람을 찾고 있는 듯하다. 이제 이 나라에서 촛불은  '저항하는 시민', '불복종하는 시민'의 상징이 되고 있다.

사진 속의 그가 들고 있는 촛불을 보며 나는 몇 해 전 촛불이 횃불이 되고 들불이 되게 했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체 게바라보다 더 완벽한 인간상'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제종철 열사. 서른다섯 짧은 생애를 마치고 떠난 날은 다름 아닌 그의 생일날이어서 더욱 큰 안타까움과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는 효순·미선 양이 미군 장갑차에 희생됐을 때 이들 부모가 진실을 밝히는 싸움에 나서도록 설득했고 언론조차 단순 교통사고로 일단락 지은 사건을 전국적인 싸움으로 확산시킨 의정부 지역 활동가였다.

이 싸움은 초기 미2사단 항의 방문, 의정부역 천막 농성, 시청 광장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비가 있었다. 골리앗 미군과의 싸움은 처음부터 어려움이 예상된 것이었고 국가권력의 압력도 있었다. 그의 노력은 이를 넘어 미선·효순 항쟁의 밑불이 되었다. 당시 그가 했던 역할을 이번엔 미선이와 효순이 또래의 여중·여고생들과 네티즌이 맡았다.

의정부에서 촛불을 들었던 의정부여고생들은 첫 번째 '촛불소녀'들이 되었다. 이때부터 모이게 된 작은 촛불들은 중요한 사회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다시 심지를 돋우고 이웃들을 불러모으며 새로운 집회문화를 만들어냈다.

제종철은 '미군 무죄평결 1주년 기념 촛불집회'에 참석한 뒤 기찻길에 던져진 채 생을 마감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날도 촛불과 함께였던 것이다. 경찰은 서둘러 자살이라며 수사를 종결지었지만 자살로 매듭짓기엔 석연찮은 점이 많은 그의 죽음은 무수한 의문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제종철은 1987년 6월 항쟁을 겪으며 거리에 나서기 시작했다. 지인들은 그를 낙관적이며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깊었고 모든 일에 헌신적인 청년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학시절의 학생운동은 졸업 후 지역운동으로 이어졌다. 의정부 지역에서 저소득층 서민을 위한 자녀 탁아방과 어린이 무료 공부방을 열어 직접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 자신 가난으로 공사판에서 일하기도 하면서 낮은 자들의 삶과 함께 했다.

제종철의 촛불 같은 삶은 <어느 혁명가의 초상>이라는 한 권의 책 속에 담겨 있다. 한 후배는 그를 회상하는 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나에게 말하더군요. '넌 너를 믿냐?'……저의 머뭇거림에 그는 말하기를 '난 너를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그의 삶 전체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 촛대였다.

나와 함께 촛불을 들었던 시인 임성용은 그해 의정부에서 농장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일터는 효순, 미선이 사건이 났던 장소 근처였다. 그때에도 촛불을 들었던 시인은 "멀리서나마 지켜본 제종철은 볼 때마다 항상 환하게 웃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 백만의 촛불들이 사그라든 후에도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게 됐어"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후배 민태호(제종철추모사업회)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하는 분이었어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앞장 서서 일하는 사람이었죠. 우리들에게 말을 통한 훈계보다 실천을 통한 깨우침을 줬던 분이죠." 

제종철이 밝힌 촛불을 이어받은 이병렬의 촛불은 전주에서 온몸을 불살라 다시 피어났고 '미친 소 수입고시 철회하라'는 구호와 함께 빛나고 있다. 그의 쾌유를 비는 촛불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3차 수술을 앞두고 그는 숨을 내려놓았다.

분신 당일 코아백화점 앞에서 이병렬씨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는 단호히 맞서야 한다"는 문구를 자필로 쓴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유인물은 그의 유언이고, 세상에 마지막 남긴 유언이었다.

그의 자필 유인물은 이번 촛불집회에서 눈에 띄었던 자필 '손플랑'들을 떠올리게 한다. 50~60대의 어떤 시민은 종이 위에 '촛불 든 당신의 손이 아름답습니다'라고 적은 글귀를 직접 적어 나눠주었고 여중·여고생들은 뜻 깊고 개성 있는 문구를 손수 써 들고 나왔다.

그는 분신 당일까지 '광우병위험 쇠고기 수입반대 전북지역 촛불문화제'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정읍 산외면을 고향으로 둔 그는 청소기능직으로 일하기도 하고, 남원에서 신문배달을 하고 올해 직업훈련원에 다니기도 했다. 최근엔 직장을 얻기 위한 많은 노력 끝에 자활후견기관의 소개로 팔복동에 소재한 속옷 만드는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남동생은 병원에서 치료중이고 노모도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가 살아온 삶은 지난 한 달여 동안 시청을 촛불로 붉게 물들인 이들의 삶과 같다.

그의 염원처럼 세상을 바꾸지 않는 한 약자들의 삶은 미래에도 되풀이될 것이다. 약자들의 삶을 서슴없이 짓밟거나 외면하는 강자들의 사회 구조에서 그의 죽음은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희생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타살이기도 하다.

유월항쟁 기념일인 6월 10일 집회에서는 그의 조카가 나와 "삼촌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며 울먹거렸다.

지금 시청 광장은 보고 듣고 말할 자유가 넘실대는 오감의 해방구가 되고 있다. 오감의 해방 속에서 우리가 되찾은 것은 사랑이다. 너무 오래 잠자던 사랑이다.

이 사랑을 믿지 않는 권력자들은 방패로 내려찍듯 국민의 뜻도 내려찍으며 운하를 팔 것이고, 해산작전하듯 제2 제3의 기륭과 이랜드가 되어 앞으로도 끝없이 양산될 비정규직 여성들을 일터로부터 내쫓을 것이고, 선무방송하듯 보수 언론을 통해 폭력과 죽음을 감추고 10%의 이익을 대변할 것이다.

그의 죽음을 헛되이하지 않는 길은 그가 들고 있던 두 개의 촛불을 이어받아 하나의 촛불을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그리고 촛불을 우리들의 가정과 일상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친 그의 구호들은 약자의 목소리였고 우리 사회 90%에 이르는 약자들을 위한 구호였다. 광우병 소고기 반대와 한반도 대운하 건설 반대, 한미 FTA 반대는 그가 목숨까지 걸고 막아야 했던 간절한 것이었다.

 송기역
송기역 ⓒ 작가회의
사후 그의 집을 맨처음 찾아갔던 전준형(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사무국장)은 "10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월세로 혼자 살고 있었어요. 열사의 뜻을 이어받는 일은 그가 인식한 세상의 많은 모순과 불합리를 바꾸는 일입니다. 유언으로 남긴 '세상을 바꾸자'는 말은 쇠고기 협상만이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모순과 불합리를 바꿔야 한다는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오늘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약력] 시인. <삶이보이는창> 편집위원.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송기역#작가회의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