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에 대하여
나의 출퇴근 시간은 각각 30여 분이다. 이 시간 동안은 자연스럽게 음악방송을 듣는다. 오늘 아침에는 '마음에 걱정을 담지 말고 편안하게 생활하자'가 교리인 'still water(고요한 물)'교 신자라고 스스로 칭하는 93세의 할머니, 동화작가이자 원예가 타샤튜터(Tasha Tudor. 1915년 보스톤)의 삶을 소개하는 내용을 들었다.
할머니의 지향하는 삶이 나의 꿈과 일치하여 시간을 내어 할머니의 말씀 중 주옥같은 내용을 반추 하면서 할머니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볼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별 의심 없이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우리 인생의 당연한 과정처럼 여긴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 태어나고(生) 나이 들고(老) 죽는(死) 과정이 더 자연스러운 삶의 단계라고 생각한다. 병이 드는 것은 잘못된 음식과 걱정(스트레스)이 유발한 사고의 일종이다.
인간들이 발달된 기계문명에 의한 편의를 추구하고 자연의 순환고리를 끊는 우주의 순리를 거스르다 보니 병에 걸리고 죽음에 이른다. 우리가 질병으로 죽는 것은 재고 여지없는 사고이다. 자동차나 비행기 사고만이 사고가 아니다.
가을이 되어 결실기가 끝나면 화려한 단풍이 들고 겨울을 맞는 것이 자연의 흐름이듯이 나이가 들어 풍성한 인생의 결실기를 맞고 낙엽 지듯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주변에 천수를 누리고 병들지 않은 채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다. 아침도 잘 드시고 목욕 후 옷가지도 정갈하게 갈아입으시고 "이제 갈란다"고 방으로 들어가셔 돌아가셨다는 분들의 얘기를 종종 듣는다. 집사람 친구어머니의 경우도 이러한 경우이다. 그분은 아주 믿음이 깊은 천주교 신자였다.
타샤튜터 할머니도 병이 없는 삶을 살고 계시고 스콧이어링 역시 이러한 삶을 살다가 가셨다. 또 우리나라 선승 중 고승들은 대부분 이런 형태로 타계하셨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다 가실 것이다.
이런 분들은 예외 없이 깊은 믿음으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았고, 노동을 했으며 거친 음식으로 식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거친 음식이란 동물이나 먹는 음식이 아니라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되도록 조리를 적게 한 기름지지 않은 음식이다.
음식을 탐하지 않고 소식하면 욕심이 줄고, 욕심이 줄어들면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으로부터 온다. 지식(편견으로 얼룩진 알음알이)을 멀리하고 지혜를 따른다면 만사가 순조롭지 않을 수 없다. 세상사 모든 것이 축복임을 알게 된다. 나도 어느덧 나의 당뇨병을 사랑하고 같이 살아간다. 가능한 당뇨병이 싫어하는 것은 멀리한다.
당뇨병은 영적인 삶을 요구한다. 특히 정원을 가꾸고, 마음을 순화하고, 나를 낮추고, 남에게 이로운 자가 되며, 인생을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 정원을 가꾸는 일 중 집사람은 화초분야를 주로 담당하고 나는 나무로 지을 계획인 건축 쪽 일을 담당한다. 내 쪽 일은 아직도 집사람과 의견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정원을 가꾸는 마음에 대하여
집사람에게는 여동생이 둘이다. 딸만 둘인 바로 밑의 여동생의 남편은 건축사이고 주로 아파트건축현장 감독 일을 한다. 이들도 살아온 과정을 보면 그리 평탄했다고 볼 수 없다. 많은 문제들을 삭히고 소화한 뒤 이제 본 자리를 찾은 것 같다. 행복은 말로써 표현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얼굴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이다.
처제의 남편인 김 서방은 성격에 매우 섬세한 예술 감각이 있다. 처제와 김 서방은 성격차이와 주위의 환경(시댁 문제들) 때문에 마찰을 자주 빗더니 그들이 새로 이사 간 아파트 옥상에 정원을 만들고 가꾸면서 김 서방의 성격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모든 사물에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 아주 긍정적이고 유모와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들은 몇 평 안 되는 정원이지만 아주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아 사철 꽃이 피고진다. 적고 흔한 야생화들이지만 그들과 더불어 사는 얘깃거리가 많다. 보성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처제 친구의 야생화원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시랑헌(지리산 나와 집사람 농장)에 들리겠단다. 그들과 우리는 옥상정원과 야외정원의 다른 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원을 통해 신의 세계를 들여다보겠다는 목적은 동일하다.
정원을 만드는 방법론에 대하여
'시랑헌은 경사가 심하니 승용차를 몰고 올라오지 말라'는 것을 시랑헌까지 물과 간식을 가지러 가는 집사람이 안쓰러워 승용차를 몰고 올라가다 도중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굴착기로 밀다가 차를 망가트려 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집사람은 김 서방과 처제가 도착하여 앉자마자 "아~이! 지영이 애미야! 니기 형부가 이런 사람이어야" 하면서 집사람의 나에 대한 성토가 벌어진다.
아들이 아빠 생일 선물로 30만원 정도의 나무를 사겠다면 그냥 30만원 범위 내에서 사야지, 기어코 120만 원짜리 목백일홍을 사버리면 아들이 어떻게 되겠냐?
때는 이 때다 싶은지 김 서방이 나선다. "성님은 다 나쁜데 이건 더 나뻐" 하면서 집사람을 응원하고 나선다. 집사람은 몇 년 묵은 체증이 올라오는지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뱉어 낸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과수 및 정원수 묘목이 갑자기 한 트럭 들어 닥치니 종류가 너무 많아 무엇이 오고 안 오고도 모르고,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었는지도 모르게 만들어야 되겠냐? 자기는 구례 및 순천 등 각종 농원을 다니면서 각종 야생화, 라일락, 녹차나무 등 제대로 분만들기 된 좋은 묘목들을 1/10도 못되는 가격에 사왔단다.
김 서방의 장단이 때 맞춰 나온다. "성님은 다 나쁜데 이건 아주 나뻐."
그도 그렇지! 네 형부가 경기도 광주까지 목조학교에 다니자고 할 때만 해도 군소리 없이 2개월 동안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서 2시간 동안 운전해가며 모시고 다녔다. 그래서 7~800만 원 들여 목수공구를 사고, 오두막 짓고, 다 좋다 이 말이야!
그런데 이제 다른 5~7채 목조건물을 지을 계획이고 이들 집에 사용할 가구를 만들어야 된다며 3개월에 수강료가 120만원하는 전통목가구 공방에 등록하고 소목장 공구, 재료비 등으로 백만원 넘게 쓴 것까지도 좋은데, 지리산에 아예 공방건물을 짓고 3~4천만원 들어가는 목공공방장비를 산다고 하니 내가 어디 살것냐? 그래도 골프장 회원권 사는 것보다 낫단다. 기가 먹히지? 하면서 목청을 높인다.
김서방도 절정의 변죽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성님! 성님은 다 나쁜데 이건 제일 나뻐" 하면서 기념을 토한다.
집사람은 나에게 미안했는지 슬쩍 나를 한번 쳐다 보더니, 다시 나에 대한 성토를 계속한다. 한옥과 서양의 팀버프레임에 관한 책을 10권 가까이 구입하고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하더니 이제 연구소 정년퇴임하면 한옥학교를 마스터하고 캐나다 팀버프레임(Timber Frame)전문학교에 등록하겠단다. 한 학기 등록금이 천만원 정도 한단다. 네 형부 맛이 좀 간사람 아니냐?
나와 처제는 묵묵히 집사람 얘기를 들으면서 수박만 먹고, 집사람과 김 서방은 장단이 척척 맞아 돌아간다. 이제 김 서방은 나에게 윙크 사인을 하면서 나를 혼내는 시늉을 한다. 그런 김 서방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저 사람이 집사람의 맺힌 울체증을 저렇게 풀어주는구나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집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돈다.
김 서방과 처제를 보내며 손을 흔드는 나와 집사람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김 서방의 집사람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세심한 배려가 고맙다. 살며시 나에게 다가온 김 서방은 "성님! 힘드시겠네요, 힘내세요! 저는 성님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며 내 손을 꼬옥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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