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WTO 반대 시위와 2001년 제노바에서 열린 G8 정상회담 시위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반대운동을 초국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다.
알렉산드로 바리코가 쓴 <넥스트>(김현철 옮김, 새물결 펴냄)는 2001년 연말에 이탈리아에서 출간됐다. 지은이는 그 해 7월에 제네바에서 열린 G8정상회담과 초국적으로 연대한 반대 시위를 지켜보면서 '지구화 문제'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두 대의 납치된 항공기가 충돌한 사건이 일어난 직후 이 글을 썼다고 한다.
G8 정상회담이 열리는 동안 제노바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30만 명이 넘는 반 지구화 시위대가 모여 시위를 벌였고, 경찰과 충돌 과정에서 시위대 1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부상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지구화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모른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곧바로 "진득하고, 꼼꼼하게" 그리고 안간힘을 쓴 끝에 일련의 개념을 머릿속에 정리했고, 네 편의 긴 사설로 정리하여 <레푸블리카>지에 연재했다. 이 책은 <레푸블리카>지에 연재하였던 내용을 다듬고 발표되지 않았던 몇몇 글을 보태어 엮은 것이다. 이 책을 쓴 알렉산드로 바리코는 지구화 문제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정치·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니라 철학과 음악을 전공한 전업 작가다.
음악적인 글을 통해 글쓰기의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의 작품들은 여러 차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가 쓴 소설은 3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 알렉산드로 바리코가 쓴 소설 두 편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고, 그가 오페라와 문학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은 이탈리아에서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이탈리아 문화 예술계에서 꾀 인정받는 작가이고 방송진행자라는 것이다.
신문에 사설 네 편이 실린 이후에 소설가, 작가, 방송 진행자라는 자신의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그가 사설을 책으로 엮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다 보니 대학 교수나 경제 부처 장관보다 한결 명료하게 뜻을 전할 수 있다. 둘째, 자신과는 직접 상관없는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편견이나 기타 이권에 구애받지 않아서 사태를 좀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따라서 이 책은 전문가의 견해보다는 '지구화'가 과연 무엇인지 소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담긴 책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알렉산드로 바리코는 서문에서 어린 자기 아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지구화, 정의할 순 없지만 증거는 수두룩
알렉산드로 바리코는 '지구화'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하기는 어렵지만, 지구화 경향을 이해할 수 있는 예들은 수두룩하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전업작가답게 "멍청이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멍청이들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지구화 사례 역시 많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그가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지구화 사례 중에서 여섯 가지를 골라 증거로 내놓고 있다.
1) 세계 어느 곳이나 한 번 가보시오. 코카콜라나 나이키나 말보로 담배를 만날 수 있을 거요.
2) 우리는 세계의 모든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살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 회사든 가리지 않고 투자하는 겁니다.
3) 티베트 승려들도 인터넷을 한다던데요.
4) 내 자동차를 좀 보십시오. 세계 각지에서 만든 부품들로 조립한 겁니다. 어떤 것은 남아메리카, 어떤 것은 아시아, 어떤 것은 유럽, 미국에서 만든 제품도 있을지 모르지요.
5) 컴퓨터 앞에 앉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온라인'으로 살 수 있어요.
6) 이건 어떨까요.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스필버그 감독의 최신 영화를 동시에 볼 수 있죠. 여자들은 마돈나처럼 옷을 입고, 아이들은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을 열심히 흉내 내죠.
여기서 독자들은 이 책이 2001년에 출간되었다는 것과 저자가 한국보다 인터넷 보급과 정보 인프라가 훨씬 뒤쳐진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급하게 지은이의 주장에 오류가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넥스트>를 쓴 알렉산드로 바리코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취합한 지구화 증거들이 과연 사실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지구화 경향을 살피고 있. 예컨대 지은이는 인터넷을 이용해서 온라인 아스피린, 책, 골동품, 항공권, 프랑스 와인, 컴퓨터, 기저귀, 프린트, 자동차 등의 구입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오랜 노력 끝에 자동차와 아스피린을 제외한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은이는 약품이나 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품목을 구입한 것만으로 충분히 지구화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아마 2008년 현재 한국이었다면 아스피린과 자동차도 인터넷으로 구입할 수 있을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 비중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기저귀를 구입하는 사람은 0.008%에 불과하고, 이탈리아에서 팔리는 책 100권 중 0.5권만이 인터넷을 통해 거래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는 0.5권 독자에만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아스피린과 자동차도 살 수 있다(?)
이 대목에서도 2001년 이탈리아와 2008년 한국은 사정이 많이 달라 보인다. 지난 6월초에 나온 한 신문기사를 보면 한국은 국내에서 팔리는 책 3권 중 1권은 온라인 서점을 통해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주식시장에 대한 검증도 시도해 본다. 실제로 세상의 모든 주식을 주식시장에서 살 수는 있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정보와 통신 발달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주식시장 역시 다른 나라 주식을 사는 차원을 넘어서 경영권을 인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국경을 넘어서 주식투자가 쉽게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기업 경영권을 인수하기 위해서는 정부 개입이라는 별도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점 역시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개별 국가 범위를 넘어서는 인수합병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최근 상황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세 번째 검증작업은 코카콜라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코카콜라가 전세계 그의 모든 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통계를 통해 '지구화'에 경향의 증거로서 불충분하다는 주장을 한다.
"미국인은 연간 평균 380병의 코카콜라를 마신다고 한다. 이탈리아인은 102병, 러시아인은 26병, 인도인은 4병을 마신다. 재미있는 것은 인도인이다. 1년에 고작 4병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수치다. … 인도인들이 1년에 고작 4병 마시는 코카콜라는 중요하고, 인도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수백 병의 코카콜라는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본문 중에서)
그런데, 인도에서 판매되는 코카콜라 통계상 지구화 경향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지은이의 주장에는 이번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도사람들은 1년에 고작 4병의 코카콜라를 마시지만, 인도에 설치된 코카콜라 공장은 인근 지역의 지하수를 고갈시켜 수만 명 인도인들을 물 부족에 시달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카콜라가 지구화의 증거(?)
이 밖에도 그는 런던에 있는 티베트 사무국을 통해서 티베트 승려들이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2008년 이 시점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승려들의 인터넷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중국의 티베트 독립 시위에 대한 무력진압은 인터넷을 통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7년이 지난 지금 티베트 승려들 중 일부는 인터넷 웹사이트를 만들거나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중국정부의 선전공세에 맞고서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 자동차는 이제 국적 개념이 무색해지고 있다는 지은이의 생각엔 공감하게 된다. 자동차의 경우 자본의 국적과 생산지 국적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부품 생산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국차', '독일차'라고 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영화와 문화산업인 경우에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극도로 높아져서 지구화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무색하다는 것이 지은이 주장이다. 일 주일 동안 이탈리아에서 상영된 영화 중에서 매출액 순위를 기준으로 상위 7편은 미국영화, 나머지 3편은 인도영화였다는 것이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미국 영화를 본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영화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미국인들이 보아온 영화의 순위표를 뒤져보았다. 상위 100편의 영화 중 미국영화가 아닌 것은 과연 몇 편이나 될까? 딱하게도 딱 한편이었다."(본문 중에서)
이러한 증거들로 볼 때, '지구화'라기 보다는 '식민정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확하다는 것이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주장이다. 지은이의 주장 가운데는 이 책을 쓴 후 7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선뜻 공감할 수 없는 내용도 더러 생겼다. 그렇지만, 지구화를 움직이는 모터의 연료는 '돈'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화 = 서부개척 → 과장된 꿈
지구화가 아무리 번지르르해 보여도 숨겨진 핵심은 '돈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 서부개척 역사를 예로 들면서 "결국 돈을 재생산하기 위한 게임판을 확장하는 것"일 뿐이었으며, 당시에는 철도가 오늘날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켰을 뿐이라고 한다.
이런 비교를 통해 그는 미국인들에게 누군가(이익을 노리고) 서부개척의 꿈을 심어주었던 것처럼, 지금도 누군가가 집단적 상상력이 사실의 벽을 뛰어 넘도록 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지구화라고 하는 새로운 꿈을 과장되게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화는 국제주의, 식민주의, 현대화와 다를 바가 없다. 국제주의, 식민주의, 현대화를 하나로 뭉뚱그려 이 시대에 적합한 집단적이고 서사적인 개념으로 곱게 포장하면 바로 지구화가 되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따라서, 지구화라고 하는, 누군가가 앞장서서 만들어내는 이 계획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점점 더 빠르게 사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구화에 대한 신화가 더욱 강해지고 공격적으로 흐를수록 그에 대한 반항도 더욱 거세진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또한 알렉산드로 바리코는 세상의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고민하지 않고 지구화라는 흐름에 편승하는 유럽 좌파들에게도 일침을 가하고 있다. 폐해가 없는 지구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하루 빨리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구화에서 나타난 두 개의 유령 전 세계에 걸쳐 발휘되는 특정 브랜드의 어처구니없는 위력과 문화의 획일성. 반지구화 단체들은 바로 이 두 가지 사항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지은이는 지구화가 몰고 오는 여러 가지 폐해들을 살펴보면서, "산업혁명 시기에 기계파괴운동"이 대안이 아니었던 것처럼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강요당하고 있는 지구화라고 하는 꿈을 잘못된 꿈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꿈'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대신 우리는 새로운 꿈을 꾸자고 제안한다.
알렉산드로 바리코가 쓴 <넥스트>는 7년 전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책이라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2008년 오늘 미국산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과 한미FTA라고 하는 큰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상황에서 지구화에 대한 그들이 만든 '보잘 것 없는 꿈' 대신에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해주는 심각하지 않은 책임에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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