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이 피었다.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바 없이
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들은 뜰에 나와서
저녁을 밝히고
나에게 이 저녁을 이해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 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비애(悲哀)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분꽃 피었다' - 장석남
동네 골목길 분꽃이 환하게 피었다. 올해도 예쁜 분꽃이 동네 텃밭에도 피었다. 분꽃은 우리의 꽃, 추억의 꽃이다. 분꽃 피면 어릴 적 소꼽놀이했던 분남이 누이 생각이 난다. 연지곤지 찍고 가마 타고 멀리 시집 간 누이 생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꽃이다.
내 고향은 경남 '조천리'이다. 지금도 비포장도로를 달려가서도, 걸어서 오리 정도를 들어가야 할 정도로 시골이다. 그래서 마을 아이들은 책보자기를 허리에 매고, 왕복 10리길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같은 학년이 아니라도, 서너살 씩 차이가 나도, 모두 동학년생처럼 사이좋게 손을 잡고 노래 부르며, 산길을 지나 들길을 지나, 먼 읍내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더구나 하교길에서는 남자애 여자애 가리지 않고, 이런 유월의 꽃이 만발한 봄 동산을 만나면 모두 모여서 소꼽놀이를 했다. 남자애들은 흙을 쌀이라고 퍼오고, 여자애들은 분꽃이랑 산딸기랑 따서, 조상의 무덤 앞에서 소꼽 살림을 차렸다. 그중 우리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분남이 누이만 유독 분꽃을 따서 얼굴에 하얗게 바르고 엄마 노릇을 잘 했다.
그 분남이 누이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집안 일을 거들다가 너무나 일찍 시집을 갔다. 나는 국민학교 졸업하고 타지로 나와 공부하여서, 방학 때나 분남이 누이를 가끔 먼 발치로 보곤 했다. 누구보다 공부를 잘 했던 분남이 누이.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분남이 누이…우리집 누나들도 그랬다. 보릿고개 심했던 그 시절, 그리 먼 옛날도 아닌데 여자아이로 태어난 죄로 국민학교 마치면 집에서 살림 배워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열 여섯 살 정도면 시집 갔었다.
그때 먼 곳으로 시집 가서, 너무 오래 보지 못해서, 내가 그때 누이를 생각하던 마음이, 내게는 아마도 연분홍 빛깔의 분꽃 같은 첫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이런 푸르게 푸른 유월의 태양 아래 함초롬히 핀, 분홍빛 분꽃속에서,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예쁜 젊은 엄마처럼 웃던 누이의 얼굴이 겹쳐진다.
분꽃의 분씨에서 나오는 하얀 가루는, 실제 우리네 옛누이들이 단장하는 분으로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소박하면서도 예쁜 분꽃은 우리네 삶 속의 옛 누이의 모습들처럼, 키가 작고 수수하면서도 예쁜 그런 우리 누이 꽃이다.
요즘은 유행처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성형을 많이 한다. 더러 거리에서 몰라보게 달라진 옛 누이의 얼굴을 마주치기도 한다. 나름대로 인공적으로 가꾼 아름다움도 돋보이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그 시절 수수하고 자연스러운 청순한 분꽃 같은 누이의 얼굴이 더 좋다. 우리네 정서상, 반갑다고 악수라도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그 소박한 인정마저 머뭇거리게 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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