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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단.  옥은 조선에서 귀한 돌이었지만 심양 황궁 계단은 대부분 옥으로 되어있다.
옥계단. 옥은 조선에서 귀한 돌이었지만 심양 황궁 계단은 대부분 옥으로 되어있다. ⓒ 이정근


동관에 머물고 있던 사은사를 호부(戶部)에서 불렀다. 지척에 있는 세자를 알현하지도 못하고 연금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사신에게 방문허가가 난 것이다. 옥으로 치장한 황궁 계단을 밟는 조선 사신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호부 수장으로 승차한 용골대가 사신을 맞이했다.

"왜 정사는 아니 오고 부사만 왔소?"
"오는 도중 영상대감께서 병을 얻어 만상에 머무르고 소신이 왔습니다."

황제가 보낸 병문안에 대한 답례로 사은사를 보내기로 한 조정은 영의정 최명길을 단장으로 한 사신단을 파견했다. 한성을 출발한 최명길이 중로에서 고열에 시달렸다. 병이 난 최명길은 의주에 머무르고 부사 이경헌이 서장관 신익전을 이끌고 심양에 도착한 것이다. 청나라는 조선에서 사신이 오면 동관에 머물게 하고 세자관과의 접촉을 차단했다. 정보공유와 소통을 막은 것이다.

"왕의 병세를 알아보기 위하여 만월개를 한성에 파견할 때, 왕래에 따른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엄하게 단속하여 보냈는데 그대 나라가 뇌물을 많이 주었다. 대국의 사신을 어떻게 보고 그 따위 짓을 하는가? 그대가 가져온 방물도 받을 수 없다. 가지고 돌아가라."

재물을 좋아하면서도 겉과 속이 다른 청나라 사람들

용골대가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조선 사신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한 선제공격이다. 조선에 사신을 파견할 현안이 발생하면 청나라 조정에서는 자기 사람을 내보내려고 암투가 벌어진다. 상납이 있기 때문이다. 한성을 다녀온 만월개로부터 물품을 상납 받으며 '조선은 봉이다'라고 키득거렸던 용골대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청나라 사람들이다.

"소방의 성의 이옵니다."
"듣기 싫다. 다시는 이런 물품을 보내지도 말고 가져오지도 말라."

사신이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선물을 물리쳤다. 이경헌이 머쓱해졌다.

"무슨 일로 왔는가?"
"국왕의 병이 날로 깊어 가는데 세자를 보내주시라는 청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경헌이 공손한 자세로 주청을 올렸다.

"무슨 방법으로 세자를 보내달라는 것이냐?"
"대군을 들여보낼 태니 세자가 국왕을 살아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해주소서."

"지난번 만장이 나갔을 때 그대 조정이 세자의 귀근(歸覲)을 진달하였고 지금 또 사신이 간절하게 고하니 국왕의 병세가 매우 중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다. 예부와 상론하여 통보 할테니 동관에서 기다리라."

고국에서 온 사신, 허락이 있어야 만날 수 있었다

항궁을 빠져나온 이경헌은 곧바로 동관으로 직행하지 않고 세자관으로 잰 걸음을 놓았다. 청나라는 사신을 면대한 이후에는 세자관 방문을 허용했다. 세자관에 도착한 이경헌과 신익전은 큰 절을 올렸다.

"세자 저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빈궁마마도 강녕하신지요? 문후 여쭙니다."
"고국에 계시는 전하께서 병환이 위중하시다 는데 시약 한 번 못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구나."
"저하!! 흑흑흑"

엎드려 있던 이경헌이 흐느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세자관 관원들도 눈물을 훔쳤다. 절을 마치고 일어나는 이경헌의 손을 잡아주던 소현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혀 있었다.

"황궁에 들어간 일은 잘 되었느냐?"
"세자저하의 귀국을 요청했는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구나. 호부에서 뭐라 하더냐?"
"칙서를 내려줄 테니 동관에서 대기하라 하였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랄뿐이다."

소현의 마음은 고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소현은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전하가 있는 조선. 아바마마가 병마에 시달리고 계시는 고국.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자신과 고국을 가로막고 있는 천산(千山)산맥의 고산준령도 두렵지 않고 압록강과 청천강의 강물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몸. 이경헌을 동관으로 보낸 소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들떠있는 세자빈의 모습을 바라보는 소현, 가슴이 미어졌다.

"저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뒤척이던 소현을 바라보던 강빈이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아니오. 빈궁! 희소식이 있을 것 같소."
"좋은 소식이라니요?"

강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고국에 돌아가게 될 것 같으오."
"정말이십니까? 저하!"

어두움에 싸여있던 강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벌써 다섯 살이옵니다. 어서 돌아가 석철이를 꼬옥 안아주고 싶습니다."

환하게 웃던 강빈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석철이는 소현과 강빈 사이의 첫 아이다. 강화도에서 10개월 된 아기를 강보에 싸 내관 김인과 서후행에게 맡기고 생사를 몰랐다. 심양에 도착하여 살아 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들떠있는 강빈의 모습을 바라보는 소현의 가슴은 미어졌다.

소현세자가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그 시각. 황궁에서는 금주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도르곤의 전승기념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봉황루.  심양황궁에 있는 봉황루. 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봉황루. 심양황궁에 있는 봉황루. 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 이정근


"조선에서 세자를 보내달라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인 조선통 4인방 중 용골대가 운을 뗏다. 조선 문제는 중요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연회석에서고 스스럼없이 논의 되었다.

"아직은 시기가 이르다 생각되오."

마부달이 시기상조론을 폈다.

"국왕이 병환에 시달린다 하니 세자를 보내지 않은 것도 인륜상 옳지 않다고 봅니다. 또한 다행히 왕이 죽으면 그곳에서 세자를 등극시키면 될 것 아닙니까?"

피파박시가 조선왕의 승하를 다행이라 칭하며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한성으로 돌아간 세자가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오? 장성을 넘어 일전을 벌여야 하는 우리가 새삼스럽게 동쪽으로 출병을 할 수야 없지를 않소."

용골대가 피파박시의 의견에 반대했다.

"좋은 방안이 있소. 세자를 내보내되 빈궁은 여기에 있게 하는 것이오."

가느다란 범문정의 눈이 번뜩였다.

"조선에 나간 세자가 부인에 대한 미련을 접고 안면몰수 할 수 있지 않소."
"조선에 있는 세자의 아들을 들어오게 한 다음 세자를 내보내는 것이오.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자식과의 인연을 끊지는 못하겠지요."

범문정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은 방법이오."

현안 중심에 있으면서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왕세자

용골대가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4인방의 웃음소리가 황궁을 메아리쳤다. 소현세자는 조선의 왕세자다. 하지만 심양에서는 청나라 관리들의 안주감이다. 귀국 역시 자의로 결정할 수 없다. 빈궁을 대동하는 것 또한 희망사항일 뿐 선택권이 없다. 세자는 청나라가 조선에 베푸는 시혜의 대상일 뿐 자결권이 없다. 청나라와 조선의 현안 중심에 있으면서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왕세자. 이것이 바로 심양의 소현세자였다.

조선을 한반도에 묶어 두는 데 성공한 청나라의 최대 관심사는 북경이었다. 홍타이지가 몸소 군대를 이끌고 삼전도를 밟았지만 이제 조선은 그의 관심 밖이다. 지금부터는 만리장성을 언제 어떻게 넘느냐고 최대 관심사다. 도르곤 역시 그렇다. 북경공략에 골몰하는 홍타이지는 조선 문제는 청나라의 조선통 4인방에게 맡겨두고 최종 재가만 내리고 있었다.

조선 침공 결정은 홍타이지가 내렸지만 그 이면에는 범문정의 세계전략이 숨어 있었다. 조선을 유린함으로써 일본을 바다에 붙들어 매 두고 명나라의 내부를 흔들자는 계책이었다. 그 전략은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부자지간의 나라 조선이 무너지자 명나라는 무력감에 흔들렸고 일본은 움츠러들었다.

조일전쟁 7년을 치르면서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한 일본은 청나라가 단 2개월 만에 조선왕의 항복을 받아내자 청나라 군대의 기동력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팔기군에 공포감을 느낀 명나라 역시 황권이 흔들리고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약육강식의 세계질서 속에서 이러한 전략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범문정은 홍타이지의 꾀주머니였다. 


#소현세자#범문정#강빈#용골대#마부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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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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