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고추가 많이 달렸어요?" "며칠 전보단 확연히 다르지?" "그러게요. 하루가 다르다는 말이 맞네!" "좀 더 두고 보라구! 붉어질 날도 머지않을 테니까!" 오후 늦게 고추밭에서 풋고추 몇 개를 따는 아내 표정이 무척 밝다. 며칠 전만해도 눈에 띄는 고추가 드물었는데, 이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래로 쭉 뻗은 탱탱한 고추가 제법 달렸다.
꽃이 피는지, 고추가 맺히는지 관심을 끄고 사는 아내가 요 며칠 고추밭에 자주 드나든다.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먹는 맛을 알아서일까? 그것도 그거지만 장맛비에 쓰러진 고춧대를 일으켜 세우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람 같은 것을 느낀 것 같다.
장마철은 작물 가꾸기에서 중대한 고비 올 장마는 작년에 비해 일찍 시작되었다. 우리 동네는 장마가 시작된 날, 돌풍과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다. 장마철에는 퍼붓는 비로 많은 피해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텃밭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고춧대가 쓰러지고, 옥수수와 토마토가 자빠지고 난리였다. 씨가 여물어 몸을 지탱하기도 힘든 완두콩은 줄기가 주저앉았다.
어디 우리 밭뿐이랴! 이웃 밭들도 피해가 있었다. 한창 수확을 앞두고 있는 키 큰 대파가 땅에 엎드렸다.
작물 가꾸는데 있어 장마철을 잘 넘겨야한다. 장마가 고비인 셈이다. 내내 잘 자라다가도 장맛비에 쓰러지고, 부러지고, 물러진다. 자칫 다된 밥에 코 빠트리는 형국이 된다.
그러고 보면 농부들은 가물면 비 오기를, 너무 많이 쏟아지면 멈추기를 바란다. 오랜 가뭄에는 단비를 기다리고, 장마철에는 제발 비가 그쳤으면 한다.
자연은 고맙게도 크게 빗나가지 않고 비를 뿌려준다. 계속되는 가뭄에도 진득하게 기다리면 생명수 같은 비를 내려주고, 몇날 며칠을 내릴 것 같은 장맛비 끝에도 밝은 햇살을 비춰준다.
그런데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는 말이 있다. 가뭄이 심하면 수확량이 줄어드는 것으로 그치지만, 장마에 홍수가 지면 모두 씻겨나가 남는 것이 없다하여 나온 말일 것이다. 그래서 '3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산다'고 했나보다.
농부들은 장마가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기를 바란다. 올 장마도 제발 점잖게 지났으면 좋겠다.
그동안 쏟은 정성이 얼마인데!
며칠 전, 내린 비로 우리 고추밭이 말이 아니었다. 고춧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이리저리 엉키었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뿌리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부러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어떻게 가느다란 몸을 지탱할 수 있었을까?
그날, 아내는 고추밭을 둘러보며 한숨을 지었다.
"여보, 고춧대를 두 번 묶었어야 했지?" "차일피일 미루다 그랬네! 일으켜 세우고 붙잡아주면 괜찮을 거야!" "제대로 일어설까 걱정이네." "이놈들 조금만 도와주면 스스로 복원하는 힘을 발휘할 거야! 한번 세워보자구!" 일으켜 세우면 똑바로 일어설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간 고추밭에 쏟은 정성이 얼마인데!
고추농사는 밭을 갈아 이랑을 만들고, 이랑에 비닐을 씌우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비닐에 구멍을 뚫고, 적당한 간격으로 고추모를 심는다. 밭고랑에 자라는 풀은 수시로 잡아야한다. 땅 맛을 보고 어느 정도 자라면 지주를 박아 줄을 띄어 고춧대를 붙잡아준다. 진딧물 방제도 하고, 때맞춰 곁순도 따줘야 한다.
별 탈 없이 1000여 주의 고추가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장맛비에 쓰러졌으니 속상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쏟아 부은 정성이 컸던 만큼 상심도 컸다.
일으켜 세우면 곧추 일어서지 않을까? 고추가 쓰러지고 다음날 아침, 동이 터오자 아내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당신, 왜 이렇게 서둘러?" "고추 일으켜 세워야지! 날이 갰어요," "혼자해도 되는데, 당신도 거들려고?" "어려운 일은 함께해야 힘이 덜 들어요." 우리는 쓰러진 고춧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밭으로 나왔다. 함께 하려는 아내의 마음이 고마웠다. 고추밭 고랑이 질척거렸다. 장화를 찾아 신었다.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고춧대를 살살 달래며 한 주 한 주 일으켜 세웠다. 두 번 줄을 띄운 윗줄을 끈으로 사이사이 붙잡아 주었다. 연한 고춧대를 다루는 일이 정말 조심스러웠다. 밑뿌리가 보이는 고춧대에 북을 주었다. 뿌리가 보일정도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어느새 해가 중천에 걸려있었다. 날은 맑게 갰다. 하루 종일 따사한 볕을 받으면 꼿꼿이 일어설 것 같았다. 일을 끝내자 마음이 뿌듯하였다.
자연의 복원력, 정말 놀랍다
일주일이 지났다. 텃밭에서 자라는 많은 작물들이 물기를 머금어서 그런지 한결 싱싱하다.
고추밭도 새롭게 태어났다. 언제 쓰러졌는지 모를 정도로 멀쩡해졌다. 힘겹게 고개를 숙인 것들이 똑바로 쳐들었다. 서로 얽히고설킨 가지들도 제자리를 잡았다. 자연의 복원력이란 게 정말 놀랍다. 쏟은 정성을 알아 준 걸까? 신통방통한 변화에 감사한 마음뿐이다.
힘든 고비를 넘긴 고추밭에서 생기가 넘쳐난다. 왕성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바람에 잔잔하게 흔들리는 고추밭이 참 보기 좋다. 잃을 뻔한 것을 다시 얻은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아내는 저녁 식탁에 풋고추와 된장을 준비하였다. 아삭아삭 씹히는 매콤한 맛이 식욕을 돋운다.
아내가 밥상머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일장 연설을 한다. 논리가 그럴 듯하다.
"여보, 당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도 여러 부류가 있죠? 모범생도 있고, 속 썩히는 애도 있고! 그래도 모두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해요. 처음부터 삐뚤어진 애들이 어디 있겠어요? 환경에 따라 잠시 곁길로 들어서기도 하지만, 정성어린 관심으로 보살피고 존재를 인정해주면 곧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이에요. 비바람에 쓰러진 우리 고춧대 손잡아 주니까 똑바로 일어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