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에서 소설 책 고르는 즐거움도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진열대에 놓인 책들은 많지만,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내려놓을 뿐이다. 즐거움은 나중이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만한 책을 만나기도 힘들다.
'공급이 수요를 결정한다'는 마르쿠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요즘은 독자들이 책을 고를 기회마저 얻기 힘들다. 출판사마다 돈이 될 만한 책을 내는 일은 이제 흉도 되지 않는다. 제법 돈을 모은 대형 출판사들은 저들이 내는 책에 아예 독자들의 입맛을 길들이려고 한다. 아무래도 돈이 되려면 십대나 이십대 독자들의 구미를 맞출 필요가 있겠다.
이러다 보니, 책방의 서가에 꽂힌 소설책도 대개 젊은 작가나 일본 작가들의 작품 일색이다. 조금 '시대에 뒤떨어진 취향'을 지닌 독자들이 즐거워할 만한 소설 책 만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구자명의 소설집 <날아라 선녀>는 모처럼 책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말장난에 가까운 재담과 엽기에 가까운 발상들이 난무하는 요즘 소설책들 틈에서, 여전히 '촌스러운' 70년대식 말투로 한물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 용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무겁고 엄숙한 것이라면 진저리부터 치고 달아나는 요즘의 젊은 독자들에게, 구자명은 혹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데?"
안팎으로 실팍한 이야기의 즐거움
요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당돌하고 엽기적인 인물들이 자아내는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은 별나긴 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담아둘 만한 감동은 얻기 어렵다. 겨자처럼 톡 쏘는 에피소드와 발칙한 언어들은 혀끝에 강렬한 자극을 주지만, 포만감을 주진 못한다. 읽을 때는 낄낄거리다가도 책을 덮고 나면 바로 지워져 버린다. 가히 휘발성이 강한 디지털 시대의 이야기답다.
레스토랑에서 군내 나는 김치를 찾는 사람처럼, 나는 서점에 널려 있는 현란한 표지와 발칙하다 못해 당혹스럽기까지 한 제목의 책들 틈에서 여전히 '군내 나는 책'들을 찾기 바쁘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이런 소설들을 쓰는 작가들이 일거에 사라진 탓일까? 이런 책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우리 문단은 유난히 조로 현상이 심하다고 한다. 만년에 원숙한 대작들을 내 놓는 외국의 작가들에 비하면, 환갑 같지도 않은 환갑만 되어도 붓을 내려놓은 채, 난이나 돌에 빠지거나, 문학을 가르치는 일에나 나서는 것은 기이한 현상이다. 쉬고 싶지 않아도 쉬어야 하는 이유도 있을 법하다. 한때 문명을 날리던 중견작가들마저 출판사의 홀대로 작품집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하니 말이다.
이런 불만 중에 만난 구자명의 소설집 <날아라 선녀>는 오랜만에 책읽기의 즐거움을 주었다. 여섯 편의 단편과 중편소설들은 두 가지의 즐거움으로 채워져 있었다. 하나는 안팎으로 살이 꽉 찬 이야기의 충실함이다. 이리저리 분위기 잡느라 냄새만 풍기다 마는 잡다한 말장난을 넘어서서, 구자명은 소설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명제에 충실한 작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충실함은 형식에 대한 의도적인 모색과 탄탄하게 엮인 속 이야기의 실팍함에 있어 보인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수하에서 임진왜란에 함께 참전한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이 등장하는 '나리나리 개나리'는 등장인물부터 흥미롭다. 스포트라이트의 그늘에 가려진 조연급 인물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떠할까. '나리나리 개나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동백처럼 일거에 피고 지는 영웅의 삶보다는 오로지 땅바닥을 기며 근근이 뿌리를 내려가는 'B급 인생'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이어지고 있다는 잊기 쉬운 상식을 깨우친다.
이야기의 내용뿐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작가의 관심 또한 범상치 않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액자소설의 장치들은 실로 집요하고 교묘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시나리오를 구상 중인 '우섭'이라는 이야기꾼과 시공을 넘어서 조우하는 임진년의 두 인물(충무공과 무위공)은 작가가 이야기의 내용물뿐만이 아니라, 그 형식에 대해서도 유난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처용'에 관한 설화를 원형으로 변주되는 두 편의 소설(<누가 처용의 비늘을 보았는가>, <처용의 딸>)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리 소설의 모자람을 이야기할 때마다 형식에 대한 실험의 부족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점에서 역사와 설화라는 실타래에서 한 올 이야기의 가닥을 끌어내서는 현란한 문양의 천을 직조해내는 작가의 노력을 짐작하게 한다.
"야, 이거 좀 힘들겠다. 차라리 소설로 만들자면 기초 텍스트로 괜찮을 것 같은데, 시나리오로 가기엔 너무 극적인 요소가 부족하단 말야. 게다가 임진왜란, 하면 충무공의 영웅적 면모를 한껏 돋워서 보여줘야 이 지리멸렬한 세상에 영웅의 출현을 원하는 대중 심리에 자극과 위안을 줄 수 있는데, 너의 관점은 뭐랄까. 오히려 그런 거하고 엇나가는 성향이 있단 말이지. 그러니까, 네가 편집해놓은 충무공 즉 무의공의 붓이 그려놓은 충무공은 그저 리더의 자질과 도덕적 풍모가 좀 돋보이긴 하지만, 그 밖의 다른 면은 필부와 다를 바 없어. 평범한 인간으로 우국충정의 강박에 시달리며 힘겹게 전란 속 일상을 영위하는, 일종의 불우한 소영웅의 이미지야. 한때 정치하는 인간들이 '보통 사람'이란 컨셉을 들고 나와 사기치는 바람에 이제 우리나라 백성은 보통 사람 별로 안 좋아한다구. 아예 밑바닥 인생이든가 아니면 확실한 영웅 스토리를 듣고 싶어한다 이거지. 그리구, 여자 얘긴 왜 하나도 안 나오냐? 아, 충무공도 다른 소설에 보면 여자 많았드만. 대중 예술에는 로맨스든 에로든 뭔가 남녀상열지사가 들어가줘야 찰기가 생기는 법이야. 하여튼 그 원고 지금대로는 남한테 줘도 시나리오 작업하기 힘들어. 난 그래도 문과출신이라 충무로 시절 인쇄 주문 들어온 스크립트 교정을 본 적이 많아서 그쪽 기본을 좀 알거든." - '나리나리 개나리'
따스한 온기의 즐거움
그의 작품에서 돋보이는 점은 온기 어린 이야기의 속질에도 담겨 있다. 소설이란 것이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정의에 따르자면, 그가 들려주는 소설 이야기 속에는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와 체취가 느껴진다.
타고난 인정으로 남들을 감싸고 돌보는 '호야 이모'라는 선행의 인물이 어디 한둘이겠느냐마는, 그의 구수한 입담을 통해 생생히 우리와 마주하게 되는 '호야 이모'의 감동은 흔한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감동의 온기는 '인간극장'류의 그것을 넘어 선다. 못 쓰는 한쪽 발처럼 일그러진 신세이면서도, 남을 끝없이 감싸고 베푸는 것을 자신의 존재 가치로 여기는 '호야 이모'는 비록 피도 섞이지 않은 짝퉁 이모이지만, 그 피를 넘어서는 온기를 느끼게 한다. 사람이 움직이는데 멀쩡한 다리도 소중하지만, 제대로 쓰지 못하는 다리도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는 '호야 이모'의 다음 구절을 읽다 보면, 작가가 이 세상과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짐작하게 된다.
결국 성한 오른쪽 발목이 부러져서 두 달 가량 깁스를 하고는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희한하게도 평생 힘줘야 할 일은 오른발에 의지하고 살아온 왼발이 오른발 대신 웬만한 버팀을 해내더라는 것이다.
"신통하제, 그기 영 빙신인 줄 알았다, 급하이까 구실을 에법 하더라 카이. 이빨이 없으모 잇몸으로 산다 카디 다 살게 마련인 기라, 그쟈? 빙삼이, 니 그새 무신 안좋은 일이 있었드노?" - '호야 이모'
그에 비해 '귀로'는 구자명의 소설 미학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 하겠다. 어려서 처자를 팽개치고 집을 나간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버림받은 채 살아오면서도 여전히 지아비에 대한 애련한 정을 지니고 있는 '어머니'와 자식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극심한 증오를 지니고 살아온 아들 '동식'이 처와 자식을 데리고 친척집 잔치에 다녀오는 노정을 겉 이야기로 삼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게 되는 과정에서 가족들은 각기 지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갈등의 노두(로두)와 맞닥뜨리게 된다. 새 여자를 따라 처자를 버리고 나간 아버지를 저주하면서도 여전히 '호프집 여자와 젓갈 파는 여자'에 곁눈을 돌리는 '동식'을 통해 작가는 인생이라는 노정과 가족이라는 운명의 행로를 교묘히 병치시켜 나간다.
"사람 참, 뭘 그리 삐칠 일이라고 언성까지 높이구 그래? 어머니 께시게시리, 그리고 내가 언제 당신 지도 봐준 것 갖고 뭐랬어? 당신이 지도를 보고 진로를 대강 잡아줬으니까, 이만큼이라도 왔지. 헌데, 문제는 길이 반드시 지도에 표시된 대로 나 있지만은 않다는 거지. 사실, 길이란 건 늘 변하게 마련이잖아. 세상이 변하니 길도 변하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 지도도 자꾸 새로 만들어지는 걸 테고…. 또 지도에 미처 다 못 올리는 지명이나 도로도 꽤 있을 거야, 안 그래?"
팔짱을 끼고 경직된 얼굴로 듣고 있던 아내가 깊은숨을 내쉬더니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되받았다.
"그렇긴 해요. 하지만 지도란 게 뭐예요? 우리가 길을 갈 때 무작정 헤매지 않도록 지침 구실을 하는 것 아녜요? 그런데 그 지침이 그처럼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 거라면 실제로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어제 있었던 길이 오늘은 뭉개져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틀어진 길이 나고, 오늘 생긴 길 위로 내일은 수많은 갈래의 또 다른 길들이 들어서고… 세상이 그렇게 숨 가쁘게 바뀌다 보면 나중엔 아무도 지도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겠지요. 시시각각 일어나는 그 많은 변화를 좇아가며 지도를 계속 만들어댈 사람도 없을 테고… 그래도 아직까진 바뀌는 것보단 그대로 있는 게 더 많으니까 우리처럼 지도를 믿었다가 낭패를 보기도 하는 거지만." - '귀로'
'귀로'는 구자명이라는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과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팔도를 넘나드는 구수한 사투리의 구사와, 생생한 인물을 돋을새김해 주는 입담은 읽는 이를 우선 즐겁게 한다.
혼미한 진로와 여러 가닥의 갈래 길을 더듬는 '길 찾기'의 플롯을 통해 한 가족의 갈래진 내적 갈등과 상처를 잇대어 나아가는 이야기의 짜임은 세련되고, 교묘하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가 '집'이라는 상투적 결말을 벗어나, 버려진 아버지의 묘가 있는 팔봉면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 찾기로 이어진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길'을 다루는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의 이야기에서 하나의 전형처럼 보여지는 '귀로'의 의미를 가족사의 화해와 회복이라는 내면적인 '귀로'로 대체한 작가의 마무리는 신선하고 감동적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죽음과 삶의 기원을 향한 '인생 행로'의 궁극적인 귀결이라는 철학적 생각에 잠기게 한다.
"으쩌? 죽읐시면 묏자리 보러 갈 그냐?"
"하하, 원하시면 까짓 거 미리 봐두죠. 그러잖아도 좋은 자리 한군데를 알고 있긴 한데…."
"뭐여, 좋다, 에미도 아조 오래 살 긋 같진 않응게… 한디, 거그가 으딘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인데…. 팔봉면이라고 아실라나?" - '귀로'
구자명의 소설에 깔려 있는 따스한 힘은 이처럼 인생이라는 혼미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호야 이모'처럼 남에 대한 깊은 배려와 따스한 인정이야말로, 어두워져 가는 낯선 길에서 멀리 바라보이던 '등불' 같은 것이 아니던지, 또 그 길을 걸으며 '귀로'의 한 가족이 마음속에 켜던 '화해의 등불'이 아니었던지 책을 덮으며 생각을 다듬어 본다.
구자명의 소설을 요즘의 젊은 독자들은 어떻게 읽어낼까. 자못 궁금하다. 어찌되었든, 오랜만에 눈이 즐겁고, 마음을 맡기고 읽을 수 있는 이야기책을 만나 무엇보다 즐겁다. 혹 책방에서 이 책, 저 책 집어들다 빈손으로 돌아서며 '자신이 너무 오래 살았다'는 쓸데없는 자괴감에 빠지는 독자들이 있다면, 구자명의 소설집 '날아라 선녀'를 권하고 싶다. 아직도 세상에는 책방에는 없으나, 거리에는 넘쳐나는 여러 사람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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