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아름다운가게 운영위원 총무인 나는 상반기 아름다운 희망나누기 실사 보고서 작성을 위해 신청이 들어온 신월동 넙너리를 방문했다. 넙너리는 ‘너울(파도)이 닿는 넓은 바닷가’라는 뜻이다.
전화 약속을 하고 현장에 도착한 곳은 말 그대로 파도가 육지에 닿는 넓은 해안가 마을이다. 도로로 사용되는 4~5쯤 되는 방파제에는 수선하기 위해 펴놓은 그물이며 양식장에 사용되는 스티로폼들이 널려 있다. 허리가 꼬부장하고 160cm나 됨직한 할아버지의 웃음 띤 마중을 보며 어려운 가운데도 낙천적인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온 목적을 말하고 비가 샌다는 방과 비바람이 들이쳐 연탄을 쌓아둘 곳이 없다는 헛간을 보려는데 십여 마리의 개들이 사납게 짖는다. 지저분한 마당과 개들의 오물에서 역한 냄새를 풍긴다.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실사 보고서를 올렸는데 수익나눔 대상자에서 제외됐단다.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 대상자는 생활 실태가 안정적이지 못한 국민기초생활 수급자와 차상위계층 등 긴급한 지원이 필요한 저소득층 빈곤가구여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살며 집수리를 요청해 도와줄 방법을 찾았지만 헌 집이라도 지어주면 대상자에서 제외돼 생계대책이 없는 그는 오히려 살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피난민 같은 생활 모습을 보고 며칠 동안 갈등하던 나는 다시 전화를 하고 할아버지를 찾았다. 원래 대상자를 밝히지 않도록 돼 있으나 할아버지와 주위 분들의 양해를 얻고 실명을 밝히기로 했다.
서일복씨는 올해 73세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직후 부모와 함께 부산으로 돌아와 살았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그는 일본말을 잘했다. 대화 중간 중간에 일본말을 사용해 해석을 요구하기도 했다. 미장일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일을 돕기도 하던 그는 하모니카가 몹시 욕심이 나 부산 송도에서 아이스케키 장사를 해 모은 돈으로 하모니카를 샀다.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틈나는 대로 판자를 삼각형으로 세워놓고 그 속에 들어가 혼자 하모니카를 불며 실력을 쌓아갔다. “할아버지 하모니카 실력 좀 보여 주세요”하며 부탁했더니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즉석 연주를 하는 폼이 대단하다. 반주까지 곁들인 노래솜씨가 수준급이다. 귀에 익숙한 클레멘타인이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할아버지 심정을 그대로 옮겨 놓은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지만 숙연해졌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할아버지 일본말을 잘 하십니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녀서 그래요. 영어도 할 줄 알아요"
"I can speak English. I am a shoeshine boy"
"영어는 언제 배웠어요?“
“6․25 때 부산에서 미군 구두닦이를 하면서 배웠어요”
“여수가 원래 고향입니까?”며 묻자 원래 경북 달성이 아버지 고향인데 총각 때 만났던 여자 고향이 여수라서 여기 정착했단다.
“원래 이 마을에서 사셨어요?”
“아니 처음에는 돌산대교 근방에서 살았는데 다리가설로 철거돼 현재 이 마을로 이사 왔지”
“이사올 때 어느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지. 객지이고 친척 친구도 없어요”
“자제분은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바닷가에 신발 한 켤레만 남기고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 빠져 죽어버렸는지 알았는데 수급대상자 정리하려고 주민등록 정리를 해보니 시집가서 어딘가에 살고 있어요”
“아니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데 한번도 안 찾아와요?”
“한 번인가 찾아왔어요. 그 뒤로는 종 무소식이죠. 사실 찾아와도 잘 곳이 없으니까 안오는 게 편하죠”
중풍을 앓고 계신다는 이웃집 할아버지가 말을 거든다. “실은 딸을 주워 와서 키웠어요. 부부간에 아기도 못 낳았죠. 부부가 밤에 헛잠만 잔 셈이죠”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사이좋게 사셨어요?”
“노무현 대통령 당선된 날 죽었어요. 마누라하고 살면서 한번도 겸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예? 한번도 겸상을 못해요?”
“해물을 떼다 시장에 내다파느라 살기가 바빴지만 항상 술을 마시고 와서 그냥 따로 방바닥에 밥반찬을 차려 먹고 살았지”
“집은 어떻게 지으셨어요?”
당시 근방에 살던 상이용사 한 분이 “여기 빈 땅이 있으니까 집을 짓고 살아라”고 해서 두어 평되는 방과 헛간이 딸린 슬레트 집을 지었다. 무허가 집인 셈이다. 서씨는 태풍이 불면 횡재(?)를 한다.
양식장에 쓰이는 스티로폼을 묶어 바지선을 만들고 인근 무인도에 떠밀려와 쌓인 나무, 그릇, 그물 등을 싣고와 집이나 개집을 짓고 좋지 않은 나무는 땔감으로 사용한다. 물은 양수기로 퍼올린 지하수를 사용해 바닥에 진흙물이 떠다녀 반드시 끓여 드시라고 주문했다. 옆에 계신 할아버지는 “친구 왔다고 커피를 끓여주지만 나는 안 마셔요” 한다.
서씨는 요즘 부업이 하나 생겼다. 낚시꾼들에게 아침 일찍 바다가운데 있는 바지선에 자신이 만든 뗏목배로 태워주고 오후에 돌아올 때 뭍으로 태워다주면 3천원을 받는다. 어떨 때는 그것도 떼어 먹고 도망가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오천원이나 만원을 주고 가는 사람도 있다. 오늘은 재수가 좋은 날일까? 아니면 내가 카메라를 대고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그랬을까? 아무튼 싱글 벙글이다. 2만원이나 벌었으니….
‘할아버지 좋은 날은 없었어요?”
“없었어”
“그럼 제일 힘들때는요?”
“할머니가 죽고 아무도 없을 때가 가장 힘들어요. 그런 날은 담배를 물고 바닷가에 나와 하모니카를 불면 마음이 진정이 돼요” 그는 담배를 하루에 두 갑씩 피운다.
밥은 동에서 나오는 수당으로 쌀을 사서 혼자 해먹고 산다. 할아버지는 이빨이 거의 없다.
“할아버지 이빨이 없는데 밥은 어떻게 씹어요”
“그냥 입념으로 우물우물 몇 번하다가 넘겨요. 반찬 같은 것은 수저로 잘게 썰어서 먹든지 죽을 쑤어 먹기도 해요”
“개는 어떻게 구했고 무엇을 먹이세요?”
“아파트에서 키우다 버린 것을 주워와 푸성귀나 식당에서 생선 머리 같은 걸 끓여 먹여요”
마침 거동이 불편한 이웃집 할머니(81세)가 산책하러 왔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결혼 십년 만에 남편이 두 아들만 남기고 일찍 죽어서, 부산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며 여성 운동을 했다는 할머니다.
“고독이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어요. 자식들은 용돈을 보내주지만 친구들은 다 죽었고 밤에 혼자 외로이 누워서 잠을 청하면 잠도 안와 수면제를 먹고 자요. 낮에는 이렇게 돌아다니니까 괜찮은데 집에 가면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때로 자살하려고 흉기를 옆에 가져다 놨지만 내가 교회 다니는데 못하죠. 지금 희망이 뭐냐면 오늘이라도 죽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혼자 살지만 집에 가면 개들이 꼬리를 흔들고 반갑게 맞이해줘요. 개들 보고 살죠. 얘들이 단 돈 몇 천원에 팔려 가면 가슴이 찡해요”
‘식코’를 감독한 마이클 무어는 “한 나라의 수준을 알려면 극빈층이 어떻게 대우받는 가를 보면 안다”고 했다. 서씨에게만 개가 더 위안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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