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 모든 것이 덧없거늘….'살다 보면 한 번씩 인생 전체가 의문으로 빠져들곤 한다. 대개 고통스러울 때 그렇다. 질병, 죽음, 궁핍, 실패, 이별 등등 수백 가지 이유로 우리는 고통의 나락에 굴러 떨어진다. 고통은 아프고 괴롭다.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날 궁리에 낑낑대다가 그만 힘에 부치면 삶을 통째로 부정해 버린다.
사람들은 또 삶에 큰 고난이 닥치면 죄의식에 시달린다. 자신의 지난 행적을 돌이켜보며 '죄'가 될 만한 일들에 대한 식별작업에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고통의 원인을 '죄'의 탓으로 돌린다. 급기야는 이 세계가 죄로 가득 차 있고, 천국은 오직 저 세계에만 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이는 '삶-고통-죄-심판'의 도식으로, 인류역사에 2천 년을 지배한 기독교도들의 해석에 기원한다. 이에 대해 니체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같은 요설이 아직도 지혜로 간주되고 있다고 개탄한다. 그리고 현대인의 육체적 결함과 허약함, 풍부한 경험의 결여를 꾸짖는다. 육체의 고통에 대해 지극히 미숙하고, 또 공상가라는 것이다.
고통을 훨씬 미워하고 나쁘게 말하기 시작했다"실존이 섬세해지고 용이해져서 영혼과 육체가 모기에 물리는 정도의 불가피한 고통을 겪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것을 너무 잔혹하고 악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시대, 이것이 인간정신의 토양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이 원래는 이렇게 나약하지는 않았다. 니체는 '고통에 대한 지식은, 인간과 시대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의 하나'라고 말하며 고통에 대한 계보학적 검증에 들어간다. 니체에 따르면 '개개인이 폭력에 대해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고, 또 이를 위해 스스로 폭력적 인간이 되어야만 했던 공포의 시대'는 달랐다.
"당시에 인간은 온갖 육체적 고통과 결핍을 견뎌내면서,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잔혹함과 자발적인 고통의 훈련을 통해 자기보존의 필수적인 수단을 파악했다. 당시에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교육했다." 반면에 현대인은 어떠한가. 육체와 영혼 두 가지 고통을 모두 견디지 못한다. 고통에 대한 수련이 일반적으로 부족하고, 또 고통 받는 사람을 보는 일이 극히 드물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보다 고통을 훨씬 더 '미워'하게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그것을 '나쁘'게 말한다.
"심지어 사람들은 '고통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조차도 견딜 수 없게 됐다. 실제로 고통을 경험하는 일이 적어짐으로써 고통의 보편적 표상을 최고의 고뇌로 여기는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크는가. 어른들이 일 나가고 형제들끼리 자급자족하며 생존의 법칙을 배우던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부모의 과보호와 시멘트로 구획된 환경에서 학교와 학원만 오가고, 일부 저소득층 아이들은 방치된다. 단단해질 기회조차 드물다. 동네 뒷산에서 놀다가 길을 잃어볼 기회는커녕 중학생이 되도록 혼자서 지하철 탈 줄 모르는 아이들도 태반이다.
삼차방정식 푸는 법은 배워도 인생문제에는 한없이 무기력하다. 삶의 문제와 고통은 오직 '입시'로 귀결된다. 그 문제도 본인이 능동적으로 돌파하는 게 아니라 학원과 부모의 치밀한 전략 하에 책상에 앉는 게 역할의 전부다. 다양한 생채기가 나고 딱지가 앉고 군살이 배길 틈도 없이 몸집만 큰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니체가 보기에 현대인의 고통의 본질은 염세주의 철학과 과민증이다. 하나같이 고통을 피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고통에 빠지고 길을 잃는다. 고통을 근절시켜야 하는 실존의 오점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고통은 '삶에 이탈'함으로써 오는 것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부정과 거부는 무거운 자들의 정신"이라며 고통에 의연해질 것을 충고한다. 그리고 '모두를 위한, 하지만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처방을 내린다.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몰락하라, 고통은 행복과 '쌍둥이' 처음 고통은 몰락의 고통이다. 고통은 언제 찾아오는가. 불행한 사건과 감정을 겪을 때 찾아오고, 그 사건을 송두리째 부정할 때 깊어진다. 인생에서 고통을 뺀 무탈한 상태로 다시 짜깁기를 해보면서 돌이킬 수 없음에 좌절한다. 고통의 검은 물길 속으로 점점 빠져든다.
이 대목에서 니체는 "고통이 아픔을 준다는 것이 고통에 반대하는 논거가 될 순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것이 고통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또한 많은 지혜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최악의 상태에서 진정한 통찰력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체험한다.
니체는 또 고통과 행복의 '쌍둥이' 론을 편다.
"쾌와 불쾌가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다. 하나를 가능한 한 많이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그만큼 많이 받아야 한다…. 하늘에까지 이르는 환호를 배우려 하는 사람은 죽음에까지 이르는 비애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현실적인 고통의 처방도 제시한다. 사상적 열광, 평온한 상황, 좋고 나쁜 추억들, 장래계획, 희망, 거의 마취제 같은 효과를 지닌 수많은 종류의 자부심과 공감 등.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무수히 많은 치료제들을 소개하며 인간이 "극도의 고통을 겪는 경우에는 저절로 의식을 잃는다"고 말한다.
신체의 변신-창조의 고통-삶의 최대 긍정 고통을 태우고 재가 된 곳에서 새로운 탄생이 시작된다. 이제 '창조의 고통'이 일어난다. 상처의 순간을 긍정하고 내게로 통합시키는 과정이다. 그런데 고통의 긍정은 '삶에 대한 다른 감수성'을 요구한다. 똑같은 것이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기쁨의 원인'이어야 하므로 긍정은 신체의 변신을, 정서의 창안을 요구한다.
갑자기 암 선고를 받으면 운동을 시작하고 해로운 음식을 줄이는 등 생활습관을 고친다. 인생의 바람막이였던 엄마의 죽음을 겪고 나서 딸은 주체적으로 삶을 꾸리고 비로소 독립을 한다. 오랜 연인과의 이별 이후 건강한 인간관계에 대해 배우고 사랑의 기술을 깨우친다. 한 사람에 치우쳤던 사랑을 공부, 이웃, 친구 등 더 많은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넓혀가기도 한다.
문자해고 통보를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달이 가고 해가 가도록 거리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입시제도에 시달리는 학생들은 먹고 자고 쉬고 싶다며 우리도 인간이라며 촛불을 들어 권리를 밝힌다.
이는 지독히 외롭고도 고통스러운 긴 싸움이다. 무수한 수수께끼와 느닷없이 덮친 우연을 '의미'로 재창조하는 것.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의 지난한 과정을 기꺼이 수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창조의 고통이다. 삶에 대한 최대의 긍정이자, 고통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다.
"창조. 그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경쾌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고통에 닻을 내리고, 고통의 파도에 몸을 실어라. 생의 거친 파도를 다룰 줄 아는 항해술을 터득하라. 그러면 앞으로 "어떤 역풍이 불어와도 두렵지 않을 수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가 쓴 '괴테에게'란 시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고통-원한을 품은 자는 그것을 이렇게 부른다.광대는 그것을 유희라고 부른다….' 덧붙이는 글 |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프리드리히 니체 저/ 안성찬·홍사현 역/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