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도를 끝내고 밭에 나갔다. 나가기 전 어머니를 살폈더니 눈을 깜박이고 계셔서 마루에 어머니 일거리를 마련해 놓고 나갔다. 흠집 난 감자, 쬐그만 감자들과 칼, 빈 통, 손 씻을 물 등등.
아침 밥 챙기러 집에 돌아 왔더니 감자를 말끔히 다듬고 씻어 놓으셨다. 내 이럴 줄 알고 밭에서 따온 애호박과 오이를 드렸다. 먹이를 발견한 맹수(!) 처럼 어머니는 화들짝 웃으시며 자리를 고쳐 앉으셨다.
도마도 없이 손에 쥔 오이를 칼로 기가 막히게 썰으셨다. 한석봉이 엄니 떡 썰 때 저 솜씨였을까 싶었다.
"야야... 오댄노? 소금 갖다 주라. 간치 놔야지"
소금을 치시더니 오이통을 쩔쩔 까부셨다.
"한 시간 쯤 지나서 물을 쪼옥 딸카내라"는 설명과 함께.
아침 밥을 한 그릇 다 드셨다. 그런데 어머니 눈은 계속 딴 데 가 있었다. 새벽에 캐 온 감자 쪽이었다.
"조고. 내가 킁거 좀 가려야겠다."
"아이고. 어무이. 인자 좀 쉬세요."
"머 했닥꼬 쉬긴 셔. 감자 내가 가려야겠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어머니가 나를 놔 두지 않는다. 쪼깨만 기다리시라고 하고 내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부엌에서 도마와 큰 칼을 갖다 드리면서 호박을 썰어 달라고 했다.
그런데 호박을 후딱 썰어 놓으시고는 나 몰래 어머니는 부엌 쪽 새로 만들어 놓은 마루로 해서 토방을 불불 기어서 감자쪽으로 전진 중이었다.
목에는 밥 드실 때 사용하는 앞 치마를 걸치고.
"어무이 이건 뭐 할락꼬요?"
내가 어머니 목에 걸린 앞치마를 들쳐 보였다.
"응? 그거는 깔고 앉을락꼬 그라지."
이미 어머니 옷은 흙과 물기로 다 젖어 있었다.
"감자가 비료도 안 주디마는 이럭키 컸나?"
어머니는 감자를 가려 담기 시작했다.
"이거는 혼자서는 다 몬 묵것다."
큼직한 감자 하나를 들어 보이며 활짝 웃으신다.
"장에 가서 좀 낵까? 이걸 우리가 오찌 다 먹노?"
무슨 놀이 하듯이 신나셨다.
"한 상자에 한 이천원 바껀나?"
나는 얼른 고무함지박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이미 오전 10경. 산골 계곡에서 내려 온 차가운 물이 이렇게 받아 두면 태양열에 금새 미지근 해져서 어머니 목욕물로 쓰면 된다.
감자를 다 가리신 어머니는 나를 불렀다.
"호미있나? 쑥 칼이나 뭐든."
"왜요?"
"저거 저기 빼뿌재이 아이가? 지금은 쎄서 된장 국 끓이믄 씨버서 안되고 들깨 갈아 부어서 끓이바라. 마신능기다."
이왕 목욕 하실 거. 이왕 옷은 다 버린 거. 그래 오늘은 왼종일 어머니 충실한 비서 노릇 하자 싶었다. 소쿠리와 칼을 갖다 드렸더니 어머니는 집 바깥 장독대 쪽으로 가서 두어 시간을 빼뿌재이(질경이) 뜯으셨다.
드디어 목욕시간. 물이 알맞게 데워져 있었다. 빼뿌재이 소쿠리를 옆에 두고 어머니는 훌훌 벗고 물통으로 들어 가셨다. 나도 윗통을 벗고 어머니 몸을 씻어 드리기 시작했다.
"야야. 누가 보믄 우리 둘다 빨개이라 카것다. 하하…."
"진짜 빨갱이가 됐네요. 어머니"
"누가 오믄 오짝꼬?"
"안 와요."
어머니는 목욕을 하면서 기분이 더 좋으셨다.
"어무이 옛날에는 목욕 어떻게 했어요?
"목욕은 무슨 목욕. 발 뒤꿈치도 넘들 한테 보이믄 안된닥꼬 해서 또랑에 가서 발도 몬 씨섯다."
"와요?
"와는 와? 너그 외할아부지가 여자는 그라믄 안된닥캐서 그런 줄 알았지."
"그러면 목욕탕에 가서 목욕 했겠네요?"
"찌랄! 목욕탕이 오댄노?"
"그러면 안 씻어요?"
"머리 감을 때도 정지 문 걸어 장그고 정지에서 씻었지."
"하하.... 그라믄 자주 못 씻었겠네요?"
"하하하...너그 할아부지는 장에 갈 때 세수 좀 하고 가락카믄 접때 씩껏다꼬 괘안타 카는 사람이다."
"하하..."
"더운데 수염 좀 깍으라카믄 오짜는 주 아나? 수염이 이씅게 그늘이 져서 시언하닥꼬 안 깍는다는 사람이다."
"하하..."
"때 좀 씨끄락카믄 머라카는 줄 아나? 때 다 벗겨내믄 몸이 가벼워져서 바람불믄 넘어간다꼬 안 씬는다칸다. 하하하하하..."
수건을 닥치는 대로 깔아 놓고 어머니를 안아 방으로 모셨다. 들어가 옷 갈아 입히고 과일 좀 갖다 드리고 나오니 지금부터 내 몫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많은 빨래감들.
시간이 이미 점심시간. 그대로 놔 둔채 젖은 내 옷부터 갈아입고는 바로 부엌에서 감자를 삶았다. 오이 김치도 무치고. 오후 2시에 해야 되는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못 한다고 연락을 드렸다.
전화가 왔다. 서울지역 탈발순례중인 도법스님 실무책임자였다. 노동계 쪽과 서울 순례 일정을 의논하고 싶다고 하종강선배와 통화 하게 해 달라는 전화였다. 하선배는 크게 반겼다. 도법스님 모시고 갈 곳이 여기저기 많다고 했다.
점심 상을 보시고는 모시 옷 모시 바지를 갈아 입으신 어머니 얼굴에 웃음이 가득. 밥 먹는데 또 전화가 왔다.
동사섭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는 **스님. 내 근황을 묻다가 스님이 그랬다.
"첨에 어머니 모시고 왔을 때는 옛날 고생하신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하더니, 요즘은 아예 어머니랑 사는 재미에 푹 빠진 듯 하오"
정말 그런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어머니랑 사는 재미가 솔찮다. '모심의 삶'은 어디서 살건 어떤 조건에서 살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내 감자 삶는 솜씨는 초특급!~ 노릇노릇. 꼬들꼬들. 파근파근. 간간하게.
근 400 여평에 맨 손으로 잡초와 함께 키운 감자다. 내 카페에서 주문을 받아 팔고 있는데 아직 반도 못 캤다.
빨래를 했다. 바닥에 깔았던 가빠는 밖에 널었다. 어머니는 한 숨 주무신다. 이렇게 기분이 좋으신 날은 옷에 실수도 않으신다. 나는 한 숨 놓고 드디어 내 할 일을 시작한다. 감자캐고 들깨 모종 옮겨 심고 팥 심고 등등
며칠 전부터 아예 장독대 옆에 전용 목욕탕을 만들어 놨다. 틈틈이 풍덩 들어간다. 이날도 물통에 서너번 들어갔다. 빨래 해 놓고 들어가고 밭에 갔다와서 들어가고 땀 흘리고 피곤하면 들어가서 책을 읽는다. 요즘은 '토지'를 읽고 있다. 옛날에 의무감으로 읽었던 명작들을 다시 본다. 장계읍에 나가면 군립도서관에 없는 책이 없다. 없는 책은 구입신청하면 1주 이내에 책이 온다.
달게 한 숨 주무신 어머니가 불렀다.
"달구통에 가 봐야 한 되나? 달갈 놨는지."
"예."
정말 달걀이 있었다. 달걀 4개를 꺼내왔다. 이틀간 코 앞 달구통에 못 가봤던 것이다. 다시 물통에 들어가려는데 어머니가 또 불렀다.
"달갈 빼 왔는데 달구새끼들 모시라도 좀 줘야 안 되나?"
"예."
맞다. 어머니 말씀이 맞다. 나는 방아 찧고 나온 싸래기랑 잡초들을 한 줌 뜯어 닭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어머니는 잠자리 들때까지 하루 해가 너무 빨리 간다고 투덜대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