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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파괴된다면, 그러니까 인간이 아주 오래 전부터 어렵사리 쌓아놓은 문명의 세계가 파괴된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어떻게 자고 입으며 먹을까. 공포 속에 고립무원마냥 놓인 그들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남아 있을까. 죽을 것인가, 끝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을 것인가. 

 

<로드>의 부자(父子)는 후자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유는 정확치 않지만 그들이 속한 세계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우거진 수풀도, 바쁜 대도시의 일상도 이미 역사의 언저리로 사라진 지 오래. 남자에게는 그나마 희미하게 그때 기억이 남아있지만, 아들에게는 그런 기억조차 없다. 아들에게 이 고통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그 자체이다.

 

사방이 미라가 된 시체 천지고, 건물들은 대부분 무너져 형태도 알아보기 힘들다. 그들의 세계에는 더 이상 빛이 없다. 어둠은 느리게, 천천히 살아남은 이들의 양심과 삶을 갉아먹는다. 땅도, 밭도, 사람들도 모두 타버려 재로 남았다. 쓸쓸한 잿빛 세상의 아우라는 그들의 내면까지도 잿빛으로 만들어 버린다.

 

남자는 아들에게 진실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아픔을 얼마나 아프게 할지 잘 알기 때문. 하지만 굶주린 생존자들이 먹으려다 남기고 간 장작불 위의 이름 모를 덩어리에 그들은 경악한다.

 

"소년이 본 것은 검게 탄 아기였다. 머리가 잘리고 내장이 빠진 채 꼬챙이에 꿰어져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본문 226쪽)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까. 남은 사람들은 생존본능만 남은 육식동물이 되어버렸다. 남자는 끝까지 그 살벌하고 황량한 세상에서 소년을 지켜 주려고 애쓴다. 

 

현대소설의 거장이 만들어낸 지옥 같은 현실, 혹은 현실 같은 지옥

 

<로드>는 끈질긴 생존의 기록이자, 암흑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를 묘사하고 보여주는 놀라운 문제작이다. 남자에게 현실은 "마비 상태나 무지근한 절망마저 넘어선 어떤 느낌, 세상이 날것 그대로의 핵심으로, 앙상한 문법적 뼈대로 쪼그라든 느낌"(본문 102쪽)이었다. 추위가 기어 다니고 어둠이 일찍 찾아오는 세상에는 더 이상 보호막이 없었다.

 

문명은 자연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결국 지켜주지 못했다. 오히려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를 괴롭히고 파괴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 결과의 토대가 바로 소설 속 세상이다.

 

생각할 시간도 없고, 근거가 없는 희망은 독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남자는 끊임없이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고 잠자리를 마련한다. 남자는 아들에게 다 말해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미 알 건 다 알아버린 아이는 끊임없이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인가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앞으로 계속 이렇게 떠돌아 다녀야 하나요.

 

그들은 여정 속에서 다양한 현상, 풍경, 그리고 사람들을 만난다. 모든 고통에 달관한 사람, 잘못인 줄 알면서도 음식을 약탈해가는 사람, 그리고 끔찍한 잿빛 세상의 풍경. 위기와 공포도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힌다. 밤은 눈이 멀 정도로 춥고 관 속처럼 어둡다. 사람들을 만나도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구분해야 한다. 여차하면 그들의 식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서부의 셰익스피어' 코맥 매카시의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 <로드>는 시적 문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거대한 하나의 세계는 황량하고 살벌하면서 아주 고요하다. 그는 그 느리고 조용한 세계를 꼼꼼하게 십자수 놓듯 묘사한다. 서사는 압도적으로 거대하고 상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하지만, 풍경은 대단히 매혹적인 셈이다. 물론 죽음의 암울한 매혹이겠지만.

 

세상의 멸망과 지옥도 가져갈 수 없었던 것은

 

320페이지가 넘는 동안 계속되는 쓸쓸하고 절망적인 내용은 읽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불편한 진실과 만나게 되는 독자는 매번 인내하고 또 절망을 감수해야 한다. 이 책이 만족스럽다면 그건 아주 즐거운 불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다.

 

책의 표1부터 4도 모자라 페이지 끝을 장식한 그 엄청난 광고 문구들을 보라. '미국에서 감히 <성서>에 비견되었던 소설'을 비롯해 오프라 윈프리 클럽 선정 도서, 1위 기록, 180만부 판매, 유명 잡지나 신문과 작가 및 비평가들의 극단적인 찬사로 도배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사람도 많겠고, 어떻게든 팔아먹고 싶은 출판사의 입장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건 심한 수준이다. 서점에서 책 고르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조종에 가깝다.

 

왠지 무조건 좋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 그러니까 좋은 느낌이 들지 않으면 네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무언의 경고가 들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인 주입식, 기계식 독서를 피하고 싶다면 도서 껍데기에 현혹되지 않길 바란다. 만약 그 문구를 모조리 다 읽고서 이 책을 보게 된다면, 읽는 내내 당신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환경과 폭력, 문명을 넘어 인간의 육체마저 무력하게 만드는 뜨거운 사랑과 인류애를 말하는 작품이다. 절망스러운 현실과 비탄한 울음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지만, 희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믿을 수밖에 없는 게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말미에서 드러낸다. 책의 주제를 드러내는 이 결말은 의미심장하면서도 경이롭다. 작가의 꼼꼼함과 치열한 의식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로드>는 진정 현대 문학의 고전이라 불릴 만하다.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소설의 서사가 드라마나 영화처럼 서스펜스가 있다거나 빠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번 격조 높은 문장들을 꼼꼼하게 한 자 한 자 읽어나가 보자. 작가가 만든 거대한 세계에 온 몸을 담가보자. 찜통 같은 더위가 현실 속의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만, 읽는 잠시나마 서늘한 지옥의 공포가 우리를 시원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어 더 매혹적인 바다를 닮았다.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2008)


태그:#코맥매카시,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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