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의 인간 승리로 닦은 금강산 길"시어미가 오래 살자니까 며느리가 방아동티에 죽는 걸 본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오래 살면 별꼴 다 본다"라는 말이다. 내가 오래 살다 보니 정말 별일 다 본다. 전신과 교통의 발달로 '지구촌'이라고 할 만큼 세상이 좁아지자 별별 보도가 나를 놀래게도 하고, 당혹스럽게도 한다.
뉴욕 금융가의 주가에 우리 주식시장이 춤을 추고, 석유시장의 유가에 따라 강원산골 주유소의 유가가 날로 달라지는 현실이다.
지난 11일 새벽에 금강산 관광특구 군사지역에서 북한군 초병의 총에 맞아 남녘 관광객이 사망했다는 보도는 겨레의 한 사람으로, 생전에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는 한 작가로서, 여간 당혹스럽지 않다.
7월 12일부터 금강산 관광을 중단했다고 하니, 애써 닦아 놓은 금강산 길이 하루아침에 다시 끊어지는 것 같아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철옹성 같은 이 금강산 길을 열기까지는 강원도 통천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한 소년의 인간 승리적인 노력이 있었다. 아버지가 소 판 돈을 훔쳐 서울로 올라간 소년이 반세기가 넘어 소 1000마리를 몰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휴전선 철조망도 감동하여 뚫렸다.
이 감동 드라마는 모든 겨레를 울려 마침내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행 바닷길이 열리고, 2003년 2월 21일 금강산 육로 시범버스가 휴전선 철조망을 넘었다. 어느 정치인도 못한 일을 그는 해냈다. 그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으로 시대의 영웅이었다.
그 얼마나 그리던 내 조국 금강산인가내가 금강산의 비경을 처음 대한 것은 고교 시절 정비석의 금강산 기행문 <산정무한>과 송강 정철의 기행가사 <관동별곡>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교사가 된 후 30여 년 동안 이 두 작품을 수없이 가르쳐서 아직도 전문을 욀 듯 하다. 이 작품들을 가르칠 때마다 학생들에게 너희들의 신혼여행은 금강산으로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꿈같은 말을 했는데, 그 꿈이 현실이 되었다.
금강산! 그 얼마나 그리던 내 조국 금강산인가. 일찍이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이라고 하며 그 절경을 경탄하였다고 하고, 어느 화가는 "금강산의 경치는 상상을 초월한 산수화로, 내 머리로써는 도저히 구상할 수 없는 한 폭의 산수화"라고 그 신묘한 경치에 넋을 잃었다는 말도 전해 오고 있다.
나는 1970년대 어느 해 가을, 진부령 넘어 고성 ○○여단으로 예비군훈련을 간 적 있다. 당시 부대장의 특별배려로, 장교 출신 예비군들은 그 무렵에는 민간인 출입금지구역 안에 있던 금강산전망대(지금의 통일전망대)에서 육안 혹은 포대경으로 금강산을 처음 볼 수 있었다.
그 비경에 감격한 나머지 한편의 글로 쓰고자 상황판의 지명을 메모지에 적는데 상황장교가 달려와 메모지를 압수하고는 사상의심자로 헌병대로 연행하려 했다. 그 절박한 순간 헌병 출신의 대학 선배가 헌병대장에게 변호해 줘서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었다.
지난 1980년대 말, 나는 내 첫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에서 주인공 신문사 기자가 신년 특집 머리기사에 실향민 어부가 거진 앞바다에서 멀리 금강산을 바라보면서 망향의 사연을 들려주는 이야기를 설정하였다.
나는 그 부분을 쓰고자 현지답사로 거진까지 갔다. 거기서 어선을 타고 동해바다로 나가 멀리서나마 금강산을 보려고 했으나 거진선박출입항통제소에서 승선허가증을 얻지 못해 끝내 바다에는 나가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참고 문헌을 통해 상상으로 해 뜨는 아침의 금강산을 묘사한 바 있다.
금강산은 천하명산으로 그 이름도 많다.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으로 불리며 이밖에도 열반산, 지달산, 중향산 등의 별칭이 있다.
조국을 잇는 한 줄기 핏줄이런 금강산을 두 차례 다녀온 뒤 '극락에서의 사흘'이라는 기행문을 쓰기도 하였다. 금강산 가는 길은 굳이 관광길만이 아닌, 분단된 조국을 잇는 한 줄기 핏줄이다. 이 핏줄로 우리는 그동안 평화를 누려왔고, 남북의 이산가족이 얼싸안고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사고 보도를 접하고는 금강산 기행 사진들을 살펴보니까 마침 2007년 7월 21일부터 23일까지 2차 기행 중, 이튿날인 7월 22일 오후 한나절을 금강산 해수욕장에서 보내면서 촬영한 사진 가운데 사고 현장 장면을 찾을 수 있었다.
사고 현장은 금강산 관광특구 금강산해수욕장으로 관광지구와 군사보호지역이 철조망이 쳐진 게 아니라, 녹색 펜스가 설치돼 있었다. 그 펜스가 바닷물이 시작되는 곳 10여 미터 앞에서 끝나있기에, 내 판단으로는 그 사이로 관광객 박왕자씨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산책을 간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쳤으면 좋았을 법하다. 허나 이미 잃어버렸으니까 지금이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게 옳다. 소를 잃은 원인과 외양간을 고치는 방안을 내 나름대로 제시해 본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를첫째, 관광주관사인 현대아산 측의 교육이 부족했다. 안전교육은 백번을 해도 부족함이 없다. 북쪽 군사보호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에 '관광객 출입금지' 팻말이라도 붙였더라면 아쉬움이 있다. 둘째, 이번 기회를 통해 남북 당사지간 재협상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관광특구와 군사보호시설 지역 간에는 일정 간격으로 비무장지대와 같은 완충지역을 두거나, 또는 최악의 경우라도 위협사격에 그치게 해야지 조준사격은 금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해야 한다.셋째, 비상시 남북 쌍방간 긴급전화를 가동케 해야 한다. 초소부대 상급자와 남측 연락사무소장(또는 현대아산책임자) 간에는 비상전화선을 가설하여 긴급할 때에는 서로 확인케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이번 사고에 책임자는 유족에게 정중한 사과와 충분한 보상을 할 것이며, 북측으로부터도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 근절책을 수립케 한다면 마치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것과 같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
행여나 이번 사고로 반통일세력이 이나마 연결된 남북의 길을 끊게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면 정말 어이 없는 일로서 금강산 길을 끊은 사람은 두고두고 지탄을 받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 사고를 뼈저린 교훈으로 남북 겨레가 마음에 새겨 분단의 아픔을 서로 달래면서 한 발자국 더 통일의 길을 앞당길 수 있기를 남녘의 한 작가가 정성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빈다.